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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건사고/우리나라 해결된 사건 사고

양평 일가족 생매장 사건

by hwani’s 2022. 7. 29.

목차

    양평 일가족 생매장 사건

    목차
    1. 사건 개요
    2. 사건 발생
         2-1. 1차 범죄
         2-2. 2차 범죄
    3. 검거 과정
    4. 수사 과정
    5. 판결

    사건 개요

    1990년 이성준(당시 31세, 전과 8범), 오태환(당시 31세, 전과 5범), 윤용필(당시 31세, 전과 6범) 남자 3명과 주범 이성준의 애인 심혜숙(당시 22세, 비전과자) 등 4인조로 범죄 단체를 구성하여, 피해자를 흙 속에 파묻는 극악무도함을 보여준 사건.

    대한민국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고, 처벌에 대한 강경론도 활성화시켰다.

    범인들 중 남자 3명은 모두 인천 출신으로 공갈, 강도, 상해 등의 전과가 있었고, 이성준은 미성년자의 나이에 범죄를 시작, 오태환과 교도소 동기였다.

    오태환은 1980년 인천의 한 고등전문학교를 나온 뒤 보험회사, 목재회사 등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술주정과 포악한 성격 때문에 오래 붙어 있지 못했고, 88년 9월부터 스페어 운전사로 근무했던 택시 회사에서도 잦은 음주운전과 행패 때문에 6개월만에 쫓겨났다.

     

    윤용필은 오태환과 중학교 동기동창이었다. 83년 이후 택시, 트럭 등을 운전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범죄꾼. 오태환이 이성준을 윤용필에게 소개시켜주면서 이들은 함께 모여 범행을 모의하기 시작. 1차 범죄 이전부터 이성준의 여자친구인 심혜숙에게 마음을 품고 있어서 이성준이 전과자라는 걸 그녀에게 아우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화가 난 이성준이, 1차 범죄 때 훔친 차에 오태환의 애인 물건을 던져놓는다. 그러나 이게 그들이 꼬리가 잡히는 계기가 된다.

     

    마지막으로 심혜숙은 남자들과 나이차이가 10살 가까이 날 정도로 어리고, 유일하게 전과가 없이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던 사람이지만 남자를 잘못 만나도 너무 잘못 만나 인생을 망치고 말았다. 본래 결혼을 약속한 다른 애인이 있었으나 그 남자의 갑작스러운 변심으로 파혼당했고, 친구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나이트클럽에 데려갔다가 하필 그날, 거기에서 이성준과 만나버리고 만 것. 헌팅으로 시작된 인연이었다고 한다. 일가족 살인 사건은 이렇게 두 사람이 만나고 사귄 지 겨우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점의 일.

    사건 발생

    1차 범죄

    이들의 범죄 행각은 강릉시 신혼부부 강도 사건부터 시작되었다. 남자 3명은 1990년 10월 28일 오후에 인천광역시에서 렌터카를 빌린 후 바로 강릉 경포대로 출발했으며 여관에서 하루를 보낸 후 여행 경비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강도를 저지르기로 작정했고, 때마침 기념사진 촬영 중이던 남편 손씨(당시 28세), 아내 한씨(당시 24세)를 납치 후 폭행, 결박한 후 승용차로 납치하였다.

     

    이들은 피해자 중 일부를 신랑 소유의 엑셀 승용차에도 나눠 태우고 현장에서 9km 떨어진 지점에서 현금과 수표 등을 강탈한 후 피해 신혼부부를 대진동 야산의 소나무에 묶어놓은 채 도주했다.

     

    범행 후 주범 이성준과, 이 1차 사건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그의 애인 심혜숙은 피해 신랑 소유의 엑셀 승용차를 마음대로 몰고 다니다 인천 시내에서 교통사고를 냈고, 사고 피해를 당한 택시기사와 출동한 경찰관에게 흉기를 휘두르면서 저항하며 도주.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경찰은 사고를 낸 엑셀 승용차가 도난 차량임을 밝혀냈으며, 그 차 안에서 발견된 오태환의 애인 최모양(당시 21세) 명의로 된 예금통장 및 가스총 등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2차 범죄

    1990년 11월 9일, 이들은 2차 범죄를 저지르기로 작정한다. 지난 번(강릉 신혼부부 강도 사건)처럼 피해자를 살려주게 되면 자신의 범죄 행각이 탄로 나게 되어 추적당할 것을 염두에 두고 두 번째 범죄 계획에서는 피해자를 살해하고 철저히 암매장을 하여 숨기기로 한 후 범행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사건 당일 오후 1시 쯤 6번 국도를 지나가던 피해자들의 승용차를 자신들의 렌터카로 가로막아 납치. 이들은 친척의 결혼식과 고희연에 가던 일가족으로 류모 씨(당시 54세)와 그의 외손녀 최양(6살), 어머니 김씨(81세), 이모 김씨(74세).

    납치 뒤 현금 20만원 등을 강탈한 후 피해자들을 폭행하면서 손과 발을 묶고 입에 재갈을 물린 뒤 트렁크에 가두었고, 이 중 어린아이는 범인들과 함께 있었던 주범 이성준의 애인 심혜숙이 안은 채 피해자의 차량 뒷 좌석에 타고 갔다. 뒤이어 범인들은 피해자 가족들을 생매장할 음모로 전날 민박을 했던 곳에서 두 자루의 삽을 빌린 후 이성준과 윤용필은 인근 야산으로 가 김씨 자매 할머니들을 낭떠러지에서 굴러 떨어뜨렸고 류씨에게 3000만 원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목을 졸랐다. 마지막으로 오태환이 "아저씨, 살려주세요"라고 울부짖는 6살 아이의 애원을 무시하고 생매장했다. 그것도 발가벗겨서. 남자 3명은 모두 대마초를 피워 환각 상태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

     

    범행을 저지르고 난 후 일당은 피해자의 차 등 2대에 나눠 탄 채로 경기도 안양시로 도주하여 하루를 머무르면서 사창가에 들르거나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는 등 태연히 지내다가, 안양에 있는 이성준 친구의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태환의 애인 최모양을 만나서 지리산으로 도피하기로 논의한 후 대전광역시로 도주. 또 범인들은 지리산으로 갈 때 심 양의 친구 박모양(당시 21세)에게도 함께 놀러 가자고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검거 과정

    주범 이성준 애인 심혜숙의 친구 박 모 양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심을 느껴 경찰서에 신고한다. 결국 사건을 접수받은 대전동부경찰서가 수사에 착수했고, 사건이 발생한 하루 뒤인 10일 낮 1시 20분경 바로 범인의 소재 파악에 성공하여 일당들이 나눠 타고 있던 승용차들을 발견, 바로 공포탄과 실탄 등을 쏘며 오태환과 심 양을 체포.

     

    한편 피살자의 승용차를 자기 마음대로 타고 다니던 주범 이성준과 윤용필은 경찰관이 발사한 실탄에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차를 억지로 타고 가다가 5중 추돌사고를 낸다. 뒤이어 추격하는 경찰들이 계속 총을 쏘면서 실탄 1발이 피해자의 차량 타이어에 맞아 펑크가 나자 차를 버리고 도주. 결국 도주했던 범인 중 윤용필은 가벼운 총상을 입은 상태에서 다음날인 11일 밤 8시 30분쯤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도림1동의 친구 집에서 주민의 제보를 받고 출동한 서울영등포경찰서 경찰관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주범 이성준은 가슴에 총상을 입는 중상을 당하고도 도주하다가 대전광역시 동구 천동에 위치한 천동주공아파트의 옥상에 은신해 있던 도중 끝내 과다출혈로 사망하여 결국 12일 오전 9시 40분쯤에 시체로 발견.

    수사 과정

    1차 범죄에서 피해를 당한 신랑 소유의 엑셀 승용차에서 발견된 증거물을 통해 범인 오태환 등 일당들의 존재를 확인했고, 오태환의 애인 소재를 계좌 정보로 알아낸 후 연고지가 대전임을 알아내어 이 일대 경찰서와도 공조수사에 착수하기에 이른다. 범인을 모두 검거한 후 증거물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흙에 오염된 버선을 발견한 경찰관의 혹독한 심문에 결국 범인들은 생매장 사건을 저질렀음을 자백하기에 이르렀다. 예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사건 내용에 경찰들도 경악했다고 한다.

    사건 여파

    당시 부검 집도의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피살자들의 사인은 전원 질식사. 호흡기에 흙 등이 심하게 들어가서 질식 사망한 상태였으며, 경찰 조사 결과 어린 아이가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당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돌덩이를 굴리고 흙을 덮어 생매장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언론에 보도되자 사건 수사를 맡은 경찰관과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아 분개했고, 서울특별시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거행된 사망자의 영결식이 진행되던 11월 14일에는 시민들도 함께 참석하여 당시 현장을 취재하던 방송 기자나 PD 등을 통하여 다양한 의견을 게시했고, 피해자의 유해와 유족을 태운 영구차는 '□□아(피해자 6살 아이),엄마!하고 한 번만 불러다오', '우리 할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딸 살려주세요.' 등의 슬픈 문구를 담은 현수막을 건 채 장지로 향했다.

     

    고작 6살이었던 딸과 친정아버지, 할머니, 이모할머니까지 4명이나 되는 가족을 한꺼번에 참혹하게 잃은 최양의 어머니는 병원 영안실 앞에서 거행된 영결식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호소문을 읽었다.

    영결식이 끝난 뒤 포천군 재림공원묘지 로 향하는 영구차에는 '구멍 뚫린 민생치안 국민은 누굴 믿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판결

    한편 이번 사건을 해결한 대전동부경찰서 형사진은 사건 처리의 공로를 인정받아 1계급 특진을 받았으며 노태우정권 당시 시행된 범죄와의 전쟁 여파로 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어 결국 검거 과정에서 사살된 주범 이성준을 제외한 범인 3명에게는 1990년 12월 4일 모두 사형이 구형되었고, 1991년 3월 5일에 사형이 선고되었다.

     

    윤용필은 1992년 12월 2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사형 현장을 입회한 문장식 목사에 따르면 그는 14시 8분에 사형장으로 들어왔다. 인정심문 때는 '그만 중지하시오'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유언을 남기는 시간에 한 말은 이러했다.

    모든 분들에게 실망을 주어 죄송합니다. 용서를 빕니다. 헤어져도 저는 천국에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하늘나라로 가게 된 것,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내 육신 중에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 분들에게 바치겠습니다.

    이미 안구와 신장 등 장기 기증을 신청했는데, 사형장에서 몸 전체를 기증한다는 자술서를 다시 썼다. 다음 인정심문을 끝낸 후에 곧바로 문장식 목사의 주도로 예배를 시작,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찬송가 405장을 부르고 문 목사가 잠깐 기도한 후 윤용필이 성경 요한계시록 14장 13절을 읽은 후 14시 30분에 집행되었다.

    또한 김형태 변호사에 따르면 ‘이 쓸모없는 하찮은 목숨에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는 말을 남겼고, 그의 모친은 아들 시신을 인수하는 자리에서 혼절했다고 한다.

     

    오태환은 1994년 10월 6일에 집행되었는데 그 역시 장기와 사체 기증을 했다. 하지만 이쪽은 끝까지 정신 못 차린 듯, 자신이 여론에 떠밀려 과도한 형을 받았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억울해했다고 한다.

    나는 범죄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론에 의해 심증으로 재판한 것을 부당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죄 지은 것은 달게 감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최고수의 죄를 개별적으로 낱낱이 따져 파악하지 않고 언론 보도에 의해서만 처형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긴 후 김우성 신부가 천주교 의식을 집례했다. 이후 입회한 스님과 문장식 목사도 함께 마지막 고별인사를 하고 악수를 한 뒤 집행되었다. 12시 28분에 집행, 12시 38분에 사망했다. 이후 그는 용인 사형수 묘역 한구석에 묻혔다고 한다.

     

    주범의 애인이자 공범이었던 심혜숙은 살인과 생매장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이듬해 열린 항소심에서 1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청주여자교도소에서 8년을 복역한 뒤, 1998년 30세 되던 나이에 가석방되어 일당 중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못 살고 위암에 걸려 2003년 7월, 고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