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건사고/우리나라 해결된 사건 사고

박근혜 5촌 육영재단 강탈 사태 핵심 관계자 박용철, 박용수 살인사건

hwani’s 2022.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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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5촌 육영재단 강탈 사태 핵심 관계자 박용철, 박용수 살인사건

목차
1. 사건 개요
2. 사건 배경
3. 사건 전개
4. 수사 결과
5. 경찰의 재수사

사건 개요

2011년 9월 6일, 육영재단 강탈 사태 핵심 관련자이면서 대략 1년 6개월 후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당시 유력대선주자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의 5촌 조카이자 서로 사촌이었던 박용철과 박용수가 같은 날 북한산에서 사망한 사건.

 

박용철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 범인으로 지목된 박용수는 박용철 사망 몇 시간 후 북한산에서 목을 매고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그런데 당시 매체들은 이듬해 겨울에 있을 대선에 영향이 갈까봐 이 사건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다. 그리고 경찰은 석연찮은 의혹을 뒤로 한 채, 사건을 둘 사이의 원한에 의한 살인과 자살로 종결시킨다.

 

사건 발발 후 5년이 지나서야 그것이 알고싶다 팀을 통해 지상파에서 최초로 다루어졌을 정도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일어난 범죄 사건들을 통틀어 가장 최고 수준의 불가침 영역에 속해있는 미스테리한 사건.

사건 배경

1990년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남매는 육영재단 소유권 때문에 크게 싸운다. 이때 육영재단은 이사장 박근혜를 등에 업은 최태민 일가가 전횡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박지만과 박근령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 "언니랑 최태민 좀 떼어내 달라"고 탄원서까지 보냈을 정도. 이 문제 때문에 다투다가 결국 박근령은 친언니인 박근혜를 밀어내고 차기 이사장에 취임. 육영재단은 부동산만 4조 원 가치(2016년 시가 기준)를 지니고 있는 대형 재단으로, 임대 수익사업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으나, 재단 운영이 폐쇄적이라 온갖 비리 의혹으로 점철되었던 탓에 수익금에 대한 루머가 무성했다.

 

그러던 와중 2007년부터 그동안 힘을 합쳐왔던 박근령과 박지만의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박근령의 남편인 신동욱 때문이었는데, 신동욱은 2007년 2월에 14살 연상의 박근령과 약혼하고 1년 8개월 후인 2008년 10월에는 결혼한다. 그런데 약혼한 이 때쯤부터 박지만은 신동욱이 육영재단의 운영권을 독점할 것을 두려워했는지 박근령-신동욱 커플과 갈등을 빚게 된다.

 

급기야 2007년 11월 28일에는 불량배 200여 명이 동원된 대규모 폭력 사태까지 터진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8년에 박근령이 육영재단을 운용하는 과정에서 재단을 불법 운영하고, 재단 운영비를 박근령이 횡령, 착복하는 등의 범법 행위가 발각되면서 이에 박지만은 박근령에 대한 공세를 더욱 밀어붙였고, 한센병자를 동원한 박지만 측은 기어코 육영재단을 장악하는데 성공해, 당시 이사장이던 누나 박근령과 누나의 남편인 신동욱, 그녀의 측근들 대부분이 육영재단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사건 전개

박근혜 가계도

박용철은 육영재단 폭력사건 당시 박지만의 최측근으로서 폭력 사태를 주도한 바가 있는 인물인데, 박용철은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친손자이자 국제전기기업 대표인 박재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즉,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삼남매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 결혼 후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기에 사망 당시 국적은 캐나다였고, 박용철은 2007년에 귀국하여 당시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한나라당 후보 경선에 출마했던 박근혜의 경호원 노릇을 했는데, 이때 박지만과도 손을 잡고 육영재단 문제에도 관여하였다.

 

2007년 7월 박용철은 박근혜 캠프에서 중국 재경부 장관을 만난다는 이유로 당시 박근령의 약혼남이자 백석문화대학교 겸임교수였던 신동욱과 중국 칭다오에 함께 갔는데, 칭다오에서의 첫날밤에 신동욱이 자기 신변이 위험하다면서 건물에서 뛰어내려 골절상을 입고 중국 경찰에게 신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육영재단 폭력사건에 개입하여 박근령 이사장을 쫓아내는 것을 주도했다.

 

당시 중국에서 구사일생으로 귀국한 신동욱은 2년 반 뒤인 2010년 2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의 홈페이지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박지만이 박용철을 시켜 나를 살해하려 했다. 육영재단 강탈 사건에서 박지만은 허수아비였고 배후는 박근혜의 주변 사람들이다.”라는 주장을 사진과 함께 올렸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문제가 되자 홈페이지 주인이던 박근혜는 하나뿐인 제부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엄청난 불구대천이었다를 명예훼손죄 및 허위사실유포죄로 고소한다.

2016년 12월 16일 뉴스 기사에서 육영재단의 폭력사건에 관여했던 관계자의 증언을 다루었는데, 이 관계자에 의하면 당시 신동욱이 표를 깎아 먹는다'고 판단한 박지만 EG회장과 참모 진영에서 '신동욱을 없애는 게 낫다'고 판단했고 이에 신동욱을 미얀마에서 총기로 살해할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재판 과정에서 신동욱이 주장한 청부 살인 시도 건은 인정되지만 박지만과의 연관성은 부정되었다. 이 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한 박용철은 박지만이 이 사건과 무관하고, 박지만의 측근인 정용희 씨가 사주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2010년 9월 1일, 재판 과정에서 박용철이 자신이 한 증언을 번복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증인으로 나온 육영재단 전 법무실 부장 이 모씨가 “박지만이 박용철에게 신동욱을 제거하라고 지시한 육성 녹음이 있고 통장으로 돈을 부쳐 준 증빙이 있다.”라는 얘기를 박용철에게 들었다고 증언했다. 박용철도 이를 긍정하면서 “EG그룹 회장 박지만의 비서인 실장 정용희가 내게 회장 박지만의 뜻이라고 말한 육성을 휴대전화 단말기에 녹음해 놨다.”라고 증언하였다.

 

박용철의 증언 이후인 2011년 8월, 신동욱은 처남이 자신의 살해기도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를 내놓지 못하여 법정 구속되었는데, 이에 신동욱 측 변호인은 2011년 9월 27일로 예정된 변론에 박용철을 증인으로 신청하였고 박용철이 9월 27일에 증언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변론을 20여 일 앞둔 2011년 9월 6일, 중요한 증언을 하기로 했던 박용철이 북한산 국립공원 사무소 수유분소 앞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신동욱은 결국 이 소송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수사 결과

2011년 9월 6일 새벽 1시경 북한산국립공원 사무소 근처에서 박용철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박용철은 자신의 차 근처에 쓰러져 있었는데, 시체는 얼굴과 배가 칼날에 수십 차례 난자당하고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었다. 칼날로 복부를 찌르고 손목을 비틀면서 후벼 판 흔적을 보아, 범인은 살인에 상당한 지식이 있으며 경험도 풍부한 자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박용철이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뒤에도 범인은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장도리로 박용철의 두개골을 세 차례 강력히 가격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박용철이 발견된 곳은 숲속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사무소 근처의 주차장이며 가로등이 비추어주는 범위 내이다.

 

한편, 박용철의 시체가 발견된 지 4시간 후인 새벽 5시 경, 박용철의 사촌형인 박용수란 인물이 박용철 살해 현장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용암문 근처의 산길에서 목이 매달린 채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시신의 어깨에는 수건이 덮여 있었다. 박용수도 박무희의 손자로서 동양육운 회장 박재호의 아들이였다. 즉, 두 사람은 친사촌 사이다.

 

경찰은 누가 봐도 평범해보이지 않는 이런 사건에 대해, 수사를 시작한지 겨우 5일만에 "박용수가 박용철을 살해하고서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경찰에 따르면 박용철이 박용수에게 1억을 빌린 적이 있는데 박용철이 돈을 갚지 않고 있었으며, 사건 당일 박용수가 범행 도구를 미리 사놓은 점, 유서를 작성한 점, 범행 전 박용철씨를 만취시키고 자신은 술을 마시지 않았던 점(부검 결과 박용철은 혈중 알코올농도 0.196%, 박용수씨는 0.01% 미만), 박용철과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박용철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때문에 불만이 많았던 점 등을 근거로 박용수가 박용철을 살해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경찰이 발표한 수사 내용은 여러모로 의문점이 많아서 그대로 믿기 힘들며 사건을 어떻게든 서둘러 매듭지으려고 하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경찰 발표가 나온 후 본격적으로 각종 의문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2016년 12월 19일 경찰청장 이철성은 "수사에 대한 외압은 없었으며 의혹만으로 재수사를 할 수는 없다" 라고 못박았다.

경찰의 재수사

정권 교체 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2017년 9월 15일, 피해자 박용철의 유족들이 경찰과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해 재수사를 요청했다.

 

그로부터 1주일 뒤인 2017년 9월 22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에 해당 사건을 배당, 재수사 절차에 들어갔다. 제3의 인물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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