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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랑인 재활시설 양지마을 인권침해 사건

hwani’s 2024.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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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랑인 재활시설 양지마을 인권침해 사건

목차
1. 사건 개요
2. 사건 내용
3. 햇볕 작전
4. 사건 이후

사건 개요

양지마을은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에 위치한 사회복지법인 천성원 산하의 부랑인(=노숙인) 재활 시설로, 한 울타리 안에 양지 요양원과 송현원(정신질환자 수용시설)이 함께 있습니다. 이 장소는 1998년 7월 16일에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으로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천성원은 1958년에 대전 삼성동에서 충남농아학교를 설립한 후, 대전에서 자강원, 대전복지의원, 평강의 집, 해 뜨는 집 등 대전/충남 지역의 여러 사회복지 관련 시설과 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양지마을은 이 천성원 소속의 부랑인 재활시설로, 일반적인 사회복귀시설이 아니며, 1998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부랑인 재활시설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행위가 적발되었습니다.

사건 내용

양지마을(養祉마을)은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에 위치한 시설로, 노숙인들을 수용하여 보호하는 시설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숙인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폭행, 감금, 성폭행, 강제 노역 등을 일삼는 인권 유린 시설이었다.

양지마을은 1989년 1월 1일 노재중(盧在中)이 설립하였으며, 1990년 12월 10일 천성원(天成院)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000년 1월 1일에는 양지마을로 다시 명칭을 변경하였다.

양지마을은 2003년 7월 24일 폐쇄되었으며, 노재중은 2004년 1월 20일 구속되었다. 양지마을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인권 유린 시설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양지마을 사건은 2003년 7월 24일, 당시 양지마을 원생이었던 박모씨가 생활실의 쇠창살을 뚫고 천신만고 끝에 인권운동 사랑방이라는 곳에 찾아가 증언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박씨는 인권운동 사랑방의 박래군 대표에게 양지마을에서 겪었던 폭행, 감금, 성폭행, 강제 노역 등을 털어놓았다.

박씨의 증언을 들은 박래군 대표는 충남 천안시 동남구에 있는 양지마을을 찾아가 시설을 조사하였다. 박래군 대표는 양지마을에서 노숙인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폭행, 감금, 성폭행, 강제 노역 등을 일삼는 인권 유린 시설임을 확인하였다.

박래군 대표는 양지마을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2003년 7월 25일, '양지마을 원생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발표하였다. 박래군 대표는 보도자료에서 "양지마을은 노숙인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폭행, 감금, 성폭행, 강제 노역 등을 일삼는 인권 유린 시설입니다. 양지마을은 즉시 폐쇄되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박래군 대표의 보도자료는 언론에 보도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03년 7월 26일, 천안시 동남구청은 양지마을을 폐쇄하고 노재중을 구속하였다.

양지마을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인권 유린 시설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양지마을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는 인권 유린 시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고, 인권 유린 시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하였다.

햇볕 작전

햇볕 작전은 1998년 7월 16일, 박래군 인권운동가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성재 의원과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 정신과 의사 김병후 등과 함께 양지마을에 대한 진상 조사를 위해 벌인 작전이다. 이들은 언론사 기자들과 방송 카메라가 함께 하였으며, 양지마을 측에 사전 통보 없이 시설에 급습하여 조사를 벌였다.

양지마을 측은 처음에는 언론사 기자들과 방송 카메라, 국회의원이 포함된 민간 조사단에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노 이사장이 도착하자 돌변하여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성재 의원이 경찰을 불러서 결국 조사는 계속되었다.

이 조사에서 양지마을은 노숙인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폭행, 감금, 성폭행, 강제 노역 등을 일삼는 인권 유린 시설임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양지마을은 폐쇄되었고, 노재중은 구속되었다.

햇볕 작전은 한국 사회에서 인권 유린 시설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양지마을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는 인권 유린 시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고, 인권 유린 시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하였다.

사건 이후

양지마을은 대한불교조계종 산하의 모 절에서 3년 동안 위탁운영하다 다시 천성원으로 넘어갔고 이후 이름을 금이성마을로 바꾸고 양지마을과 한 울타리를 쓰던 양지 요양원(이후 노아의 집으로 변경), 송현원(이후 방주의 집으로 변경) 등과 함께 사회복지법인 이화로 독립하였다. 또 양지마을과 송현원, 양지 요양원을 둘러싸고 있던 담들도 철거되었고 정문의 쇠문도 사라졌다.

 

하지만 양지마을 사건 당시의 직원들이 대부분 그대로 근무하고 있고 사회복지법인 이화의 이사장도 노재중의 둘째 부인이라는 점, 그리고 사회복지법인 이화의 주요 이사들이 노재중 관련자라는 논란에서 보듯이 겉만 바뀌었지 속은 그대로라는 비판도 있다.

 

또 사회복지법인 이화에서 발행하는 소식지에 나온 금이성 마을 후원자 명단을 보면 천성원이 단체 후원자 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보통 재단 산하의 기관에 재단에서 후원하거나 보조금을 전달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사회복지 공동모금회나 삼성 복지재단 같이 공익적 목적의 재단인 경우가 아니면 특정 사회복지재단이 다른 사회복지재단 산하의 기관에 후원을 하는 경우는 아주 흔하지는 않다. 이것이 법적으로는 재단이 분리되어 있지만 천성원 측과 아직도 금전적인 관계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양지마을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인권 유린 시설에 대한 인식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양지마을 사건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는 인권 유린 시설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었고, 인권 유린 시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화하였다.

 

노재중은 2004년 1월 20일 구속되었으나 2007년 12월 27일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240시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후 노재중은 사회복지법인 천성원의 이사장이 된 노재중의 첫째부인 윤○순과 함께 천성원 산하의 대전 한일병원에서 회장 직함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또 천성원 산하의 평강의집 원장은 노재중의 아들이 맡고 있다. 피해자들은 변변한 보상도 못 받고 다시 거리로 가거나 자리를 잡아도 일용직이나 경비원을 하는 실정이다. 심지어 양지마을 사건은 형지복지원 사건과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지도가 낮아 국가 차원에서의 진상규명 시도도 없고 피해자들이 제대로 조명받지도 못하니 더욱 암울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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