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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건사고/우리나라 해결된 사건 사고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살인사건

by hwani’s 2024. 4. 20.

목차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살인사건

    목차
    1. 박흥숙
    2. 사건상세
    3. 판결

    박흥숙

    1954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 가난한 집안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박흥숙은 어릴 적 이름이 박정렬이었다. 부모가 도로변 점포를 운영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난해진 가정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

    주변 사람들은 박흥숙이 홀어머니와 동생들을 잘 돌보는 효자였다고 기억한다. 그의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뛰어난 재능과 가난한 환경이 기록되어 있었다.

    가족이 흩어지면서 어머니와 막내 동생은 절에서 생활하고, 여동생은 남의 집 식모가 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박흥숙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였다.

    중학교 나이에 광주에서 열쇠수리공 일을 시작한 그는 공부 열정을 잃지 않아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사법시험 준비를 통해 가난을 벗어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다.

    박흥숙은 무등산 산자락에 움막집을 짓고 흩어진 가족을 모았다. 당시 20여 가구가 빈민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은 박흥숙 가족과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산중턱 무당 집에서 수발과 허드렛일을 하며 살았다. 박흥숙 본인은 체격이 작고 허약해 정도술을 수련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사건상세

    1977년 4월 20일, 한국 광주시 동구청에 소속된 건설반장 오종환과 함께 일하는 일용잡급직 철거반원 7명은 무등산으로 향했다. 이들의 임무는 간단했지만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었다: 무등산 일대에 무분별하게 세워진 무허가 판자촌을 철거하는 일이었다. 이미 구청에서는 이 철거 작업에 대해 주민들에게 사전 통보를 하여 대부분의 주택이 철거되었으나, 여전히 8가구가 남아 있었다. 이 가구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는 사람들로,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들의 집을 지키려고 마지막까지 버티는 상황이었다.

    박흥숙 씨 역시 그런 주민 중 한 명이었다. 철거반원들과의 긴장된 상황 속에서도 박흥숙 씨는 초기에는 그들에게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가재도구를 옮기는 등의 작업을 할 때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철거 과정에서 철거반원들이 박흥숙 씨의 집에 불까지 지르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특히, 지붕에 보관된 박흥숙 씨 어머니의 30만원 때문에 어머니가 격렬하게 항의했고, 이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철거반원들이 박흥숙 씨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노부부가 거주하는 집까지 불태우자, 박흥숙 씨는 극도로 분노하여, 자신이 만든 사제총으로 철거반장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상황은 급격히 폭력적으로 변했다. 박흥숙 씨는 철거반원 5명을 묶어 놓고 처음에는 시장에게 이 상황을 호소하려 했으나, 철거반원들이 반항하자 결국 망치로 공격하여 2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 사건 이후 박흥숙 씨는 즉각 도주했다. 사건이 발생한 후 박흥숙 씨의 여동생이 시장을 찾아가 이 사건을 알리고 나서야 비로소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박흥숙 씨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체포되었고, 박흥숙 씨 본인도 여수와 서울을 거쳐 결국 자수하는 결말을 맞이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무허가주택 철거 문제와 행정력에 대한 불만, 그리고 개인의 절박한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박흥숙 씨는 처음에는 철거반원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마음을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집이 불타고, 더구나 노부부가 사는 집까지 불태워지자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기에 철거반장의 모욕적인 말이 결정타가 되어 폭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이는 행정력에 의한 강제 철거의 문제점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사전에 충분한 의사소통과 보상이 이뤄졌더라면 이런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서민들의 절박한 경제상황과 정주 여건의 열악성도 이번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달리 갈 곳이 없는 서민들이 경제력의 부족으로 무허가 주택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그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행정력에 대한 견제와 서민 생활 안정 대책 마련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또한 폭력이 아닌 대화와 타협을 통한 갈등 해결의 중요성도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판결

    자수하여 검거된 박흥숙은 자신의 살인죄를 인정하고 반성한다고 밝혔다. 그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죄를 뉘우치고 어떤 극형이든 받겠다고 언급했다. 자수를 했다는 주장이 항소이유서에도 기록되어 있고 나아가 가장 중요한 점은 재판부가 기록 검토를 통해 피고 박흥숙은 체포된 것이 아니라 자수를 한 것이 맞다고 인정을 했으니 최소한 박흥숙이 자수했다는 주장은 사실로 인정되었다.

    판결문
    원심은 그의 살인수법이 아주 잔혹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했고 피고는 항소했으나 광주고등법원은 항소를 기각했다. 박흥숙이 심신미약 등 자신의 행위를 판단할 수 없는 지능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된 사유이다. 변호사는 해당 범행이 피고의 첫 범행이고 사용한 총은 미리 살인을 위해 준비된 도구가 아닌 호신을 위해 만들어 두었던 것이고 망치도 공부를 하기 위해 땅굴을 파려던 것으로 결과적으로 범행에 사용한 흉기는 준비된 살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의 생애는 원래는 올바른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정황상 우발적 범죄라고 볼 수 있는 여지가 다분하다는 점을 들었으나 광주고법은 이전에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책으로 무술을 연마한 점[5], 그리고 피고가 도주를 위한 시도를 했다는 점이 명확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심신미약을 인정할 수 없으며, 그의 성품이나 자백을 한 점 등을 참작해줄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범행의 수법과 수단이 아주 잔인하고 이전의 생애 전반이 살인의 동기가 될 수는 없었다는 점을 들어 원심을 유지했다. 이듬해 5월에 열린 대법원 상고심 또한 상고를 기각하면서 원심을 확정지었다.

    이후 빈민촌 철거 과정에서 발생한 철거반원들의 폭력이 사건의 배경이라는 점과 박흥숙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하여 박흥숙에 대한 구명 운동이 일어났지만 성사되지는 않았다.

     

    그가 수감되어 있던 도중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 예비검속으로 체포된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이 그를 옥중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는 박흥숙과의 첫 대화를 이렇게 기억한다.

    "18방! 18방!"
    누군지 아까부터 방 번호를 여러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8방! 광주사태로 들어온 사람 아니요?"(중략)
    "내가 광주사태로 들어온 사람입니다만."
    "그렇군요. 나는 박흥숙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 무등산 타잔이군요."
    "나를 아시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잘 모르실 겁니다. 김상윤이라 합니다."
    "어? 상윤이 형이 들어오셨네!"
    "날 어떻게 아시오?"
    "왜 모르겠습니까? 여기 독방에 리영희 교수님이나 박몽구 등 여러 사람이 거쳐 갔어요. 그 사람들이 형님 이야기를 많이 해서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박흥숙은 그를 많이 위로했고, 심심치 않을 만큼 통방도 하면서 지내며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고 한다. 사법고시 준비를 했던 사람이라 지적 호기심이 대단했고, 긴급조치 9호로 수감된 사람들을 통해 많은 책을 섭렵한 내공도 느껴졌다고. 박흥숙은 옥중에서 중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한문보다 백화체 공부에 열중했던 것을 보면 자신이 머지않아 석방될 거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고 김상윤은 증언한다. 하루에도 서너차례 이상 통방을 했는데, 한 일주일 정도 소식이 없다가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밤 다시 말을 걸어왔다고 한다. 몹시 들떠 있었고 까닭 모를 흥분에 찬, 환희에 휩싸여 있는 분위기로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그 다음날인 1980년 12월 24일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