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973년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목차
1. 사건개요
2. 사건내용
사건개요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은 1973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사건으로, 장준하의 의문사와 함께 박정희 정권의 치하 유신 체제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최종길 교수는 당시 경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활동하던 인물이었으며, 그의 의문사는 많은 논란과 의혹을 일으키며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의 정치적인 분위기와 박정희 정권의 통치 방식에 대한 의문과 비판을 일으키며, 국내외에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사건내용
최종길 교수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고, 독일 쾰른 대학교에서도 유학하며 법학을 수학했습니다. 독일에서는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와 제롬 코헨 교수 등 세계적인 법학자들과도 친분이 있었습니다. 1962년에 귀국한 후, 1965년에는 서울대 법학과 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969년 4월 중앙정보부에서 조작된 유럽 간첩단 사건의 참고인으로 수사에 협조하고자 중앙정보부에 자진출두했습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1973년 10월 19일, 중앙정보부는 최 교수가 유럽 간첩단 소속 간첩이라고 고백하고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최 교수의 유가족들과 일부 학자들은 최종길 교수가 고문을 받고 살해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진상 규명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사건 발생 후 경직된 상태였으며, 윤필용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실권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또한, 유럽 간첩단 조작 사건은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이었던 1969년에 발생한 사건이었으며, 당시 국내 담당 차장이었던 김치열과 5국 국장이었던 안경상의 주도하에 간첩으로 조작되었고, 고문을 받은 후 투신자살한 것으로 조작되었습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최종길 교수의 사건을 조사한 결과, 교수는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간첩이라는 자백을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이는 적극적인 투쟁은 아니었지만 굶주림의 강요에 저항하는 소극적인 저항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발표되었습니다.
이후 최종길 교수의 유족들은 국가 권력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해 최 교수가 사망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2006년 대법원은 국가가 사건에서 사실을 은폐하고 고문 피해자를 국가에 대한 범죄자로 만든 것을 인정하여 국가에게 18억 6천만원의 배상을 명령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은 최 교수의 사망을 법적으로 인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중정 직원인 김상원은 최종길 교수의 사망 당시 함께 있었으나 침묵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의문사위 조사관이 증언을 듣기 위해 미국의 집을 방문하자 주거침입으로 경찰에 신고하여 조사를 회피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 사건은 국가 권력의 고문과 협박, 그리고 가혹행위로 인해 사망한 사례로, 그의 사건을 조사하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서울대학교에서는 최종길 교수를 추모하기 위해 기념홀을 세우는 등의 행동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사건사고 > 우리나라 미제 사건 사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야구 최악의 관중 폭력 해태타이거즈 버스 방화 사건 (0) | 2023.11.08 |
---|---|
북한의 대남 도발 행위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 사건 (0) | 2023.11.08 |
춘천 우두동 어린이 강간살인 조작사건 (0) | 2023.11.08 |
1967년 경기도 이천 여교사 알몸 피살 사건 (0) | 2023.11.08 |
1967년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문화재 도난사건 (0) | 2023.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