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공포의 불길: 1990년 서울 연쇄 방화 사건의 전말
목차
1. 사건 개요
2. 전개
2-1. 잇따른 대문 방화
2-2. 점점 대담해지는 범행
2-3. 혐의점 없는 용의자
2-4. 서울 이 지역 확산
2-5. 사망자 발생과 사태 종료
3. 사건 이후
사건 개요
1990년 1월 20일부터 2월 17일까지 서울의 주택가를 중심으로 최소 137건 이상의 방화 사건이 발생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미용실 연쇄 강도 사건과 함께 중대한 민생치안 문제로 떠오르며 국회에서도 중점적으로 논의될 만큼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초기에 범인은 주로 이른 새벽에 한옥 주택의 나무 대문을 방화하는 방식으로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양옥의 철제 대문, 다세대 주택의 창틀, 차량 등에 불을 지르는 등 범행 대상과 수법이 점차 다양해졌습니다. 원래 서울 일부 지역에 한정돼 있던 범행 지역은 점점 타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시민 차원에서 방범순찰단까지 조직될 정도로 사회 불안이 심화되자 정부는 군까지 투입해 대대적인 단속 및 수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몇 명의 범인을 잡았을 뿐, 연쇄 방화의 전체적인 맥락과 배경, 주도자들을 밝혀내지 못하면서 이 사건은 결국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시국에 불만을 가진 운동권의 범행으로 추정하면서 정치적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전개
잇따른 대문 방화
1990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2동 한 주택에서 방화로 인한 피해가 발생한 것이 최초의 사건입니다. 이후 1월 28일에는 서울 성동구 금호동 등 4곳에서 주택 대문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2월 1일에는 동대문구 청량리2동과 제기동 등 11곳에서, 2월 5일까지는 성북구, 마포구, 노원구의 6개동 20가구에서 같은 수법의 방화 사건이 잇따랐습니다.
초기 수사 과정에서 경찰은 한 동네에서 연쇄적으로 방화 사건이 발생한 점에 집중해 지역 주민들 간의 이해관계에 따른 사건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러나 범행 지역이 점차 넓어지자 정신이상자나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의 범행으로 수사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범인은 대로변에 있지 않은 목조 주택 나무 대문의 왼쪽 문짝에 불을 지르며, 새벽 4~5시에 소량의 석유를 사용하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각 방화 사건이 서로 연관돼 있다고 추측하게 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범인이 대문에 불을 지르고 초인종을 누르거나 문을 두드려 집주인에게 알리는 사례들이 목격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이를 인명·재산상의 피해를 노리기보다는 단순히 소란을 일으키려는 목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점점 대담해지는 범행
2월 8일 새벽에 발생한 새로운 방화 사건은 이전과 다른 양상을 드러냈습니다. 강북 지역이 아닌 영등포구 대림동과 관악구 봉천동에서 발생했으며, 범행 시각도 새벽 4~5시가 아닌 심야 시간대였습니다. 담을 뛰어넘어 현관문과 창문에 방화하거나, 집안의 소파에 불을 붙이는 등 점점 대담해지는 범행이 이어졌습니다.
이 시점부터 경찰의 수사 방향도 정신이상자의 충동적 범행에서 시국에 불만을 품은 이들의 조직적 범행으로 변화했습니다. 경찰은 소방당국과 합동으로 주택가 순찰 근무를 강화하고, 서울특별시경찰국 예하에 '연쇄방화사건수사본부'를 설치하여 집중 수사에 나섰습니다.
혐의점 없는 용의자
2월 10일, 양천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유명성(21)이 불심검문 후 연쇄 방화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검거되었습니다. 유명성은 전과 2범으로, 인화성이 강한 물질이 담긴 플라스틱 기름통과 가스라이터를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검거된 다른 용의자들에게서도 별다른 혐의사실이 나타나지 않았고, 검거·연행 장소와 전혀 다른 곳에서 동일한 방화 사건이 계속 발생하면서 수사에 난항이 이어졌습니다.
서울 외 지역 확산
2월 14일 새벽, 충청북도 충주시 지현동의 충주시장 관사에 화염병을 던진 사건을 비롯해 충청남도 당진군과 경상남도 마산시 등 서울 외 지역에서도 방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로 인해 경찰은 서울 시내 동사무소와 예비군중대에 근무하는 방위병 2,000명을 순찰에 추가 투입하고, 현상금을 5천만원으로 올렸습니다.
사망자 발생과 사태 종료
2월 17일 새벽, 동작구 사당동의 주택에서 방화로 인한 첫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10대 신문배달원이 질식사하면서 첫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 사건을 기점으로 연쇄 방화 사건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이후 연쇄 방화 사건은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언론은 이를 삼엄한 경비의 결과로 보도했습니다.
사건 이후
1990년 하반기까지도 언론에 자주 언급되었던 이 사건은 이후 뉴스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연쇄 방화 사건은 미제로 남아 있으며, 범인들의 동기와 배경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의 불안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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