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건사고/우리나라 미제 사건 사고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사건

hwani’s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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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 암살 사건

목차
1. 사건 개요
2. 사건 전개
3. 사건 이후

사건 개요

1949년 6월 26일에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백범 김구가 서울 경교장의 자택에서 당시 포병 장교였던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은 큰 충격을 준 사건입니다.

암살자인 안두희는 체포되어 처벌을 받았으나, 그의 정확한 범행 동기와 배후 세력의 존재 여부 등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범인을 포함한 관련 인물들이 모두 사망하며 이 사건은 영구 미제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001년에 미군 CIC 소속 암살 요원이었다는 안두희에 관한 기밀문서가 공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김구 암살의 배후가 미국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사실, 안두희는 생전에 미국 정보 장교와 접촉하였음을 시인하며, 자신의 배후에 미국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증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당시 미국의 정보 장교인 제임스 하우스만은 김구가 여순 사건에 개입했다고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김구 암살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며,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습니다.

사건 전개

1949년 6월 26일 오후, 김구는 서울 경교장의 자택에서 평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점심 식사 후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순간이 갑자기 깨어지게 됩니다.

육군 포병사령부 장교이자 한국독립당 당원인 안두희가 김구를 만나고 싶다고 하여 경교장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군복을 입고 와서 비서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 헌병 대위 강홍모가 군용차에 필요한 휘발유를 얻기 위해 방문하였고, 안두희는 1층에서 대기하였습니다. 강홍모가 나간 후, 비서진들은 검문이나 경계 없이 안두희를 김구가 있는 서재로 보내주었습니다.

이 때까지 아무도 이 자가 김구를 죽이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안두희의 허리춤에 권총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그는 군인이라는 이유로 검문이나 제지 없이 통과시켰습니다.

김구는 서재에서 글씨를 쓰고 있었고, 비서로부터 포병장교가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김구는 안두희를 들어오게 하였고, 안두희가 "선생님, 먹을 갈아 드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김구가 고개를 들어 안두희를 보려는 순간, 안두희는 미국제 권총을 꺼내들어 약 1미터 거리에서 김구를 향해 4발의 총탄을 발포하였습니다. 이로써 김구는 안타깝게도 암살당하게 되었습니다.

사건 이후

1949년 6월 26일, 안두희는 김구를 암살한 뒤 경교장에서 경비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헌병사령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김구가 남북 협상을 통해 정치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 찬동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며 자신이 김구를 죽인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안두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그러나 형기가 15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암살 후 김구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격렬했습니다. 약 120만 명의 조문객이 김구의 장례식에 참석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두 차례에 걸쳐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김구의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참석하였고, 다른 도시에서도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습니다.

안두희의 행동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습니다. 사건 발생 1시간 24분만에 전봉덕 헌병 부사령관은 이 사건이 안두희 개인의 단독 범행이라고 발표하였고, 이승만 역시 이 사건이 한독당 내부의 집안싸움이라는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 등이 살인교사 같은 누명을 쓰고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안두희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1년 후 6.25 전쟁이 일어나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군에 복귀하였고, 재판 중에는 2계급 특진을 받았습니다. 사건으로부터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였습니다.

안두희는 김구 암살 후 강원도 양구군에서 군납공장을 차려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김구 암살 사건의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안두희의 집도 분노한 학생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1961년 4월 17일, '백범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재판을 받았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계속해서 비난을 받았고, 안두희는 여러 차례 암살 및 살해 위협을 받았습니다.

안두희는 이승만의 명령을 받아 김구를 암살했다고 고백한 적이 있으나, 이후에는 그것이 허위자백이었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을 여러 번 바꾸었으며, 그의 증언은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1994년에는 안두희가 건강 악화로 들것에 실린 채 '백범김구암살진상규명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하였으나, 이승만과의 관계 등 배후세력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안두희는 1996년 10월 23일 인천 신흥동 자택에서 버스기사 박기서가 휘두른 정의봉에 두들겨 맞아 사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당사자인 안두희가 사망하면서, 이 사건은 현재까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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