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대한민국 대표 국보급 센터 '서장훈'
목차
1. 프로필
2. 선수시절
2-1. 아마추어 시절(연세대학교)
2-2. 프로 시절(1998~2013)
3. 은퇴
프로필
성명: 서장훈
생년월일: 1974년 6월 3일, 키: 205.3cm(과거에는 207cm), 체중: 110kg
대한민국 농구의 대표적인 센터로, 대한민국 농구 역사에서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힘.
KBL 기록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KBL 통산 최다 득점(13,231점), KBL 통산 최다 리바운드(5,235개) 기록을 보유하고 있음. 한국 프로농구 역사상 조니 맥도웰과 함께 7시즌 연속 PER 20+를 기록한 유일한 선수.
전성기 시절에는 탄탄한 신체 조건을 활용하여 포스트업에 능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미들 슛 역시 매우 정확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3점 슛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상대방이 포스트업을 방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력하였으며, 수비를 깨고 내보내는 미들 슛과 3점 슛은 매우 정확하여 상대방은 마치 압박감에 시달렸다. 반칙으로 저지하려 해도 그의 자유투 역시 정확해서 상대방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었다. 한국 운동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잘하여 IQ가 140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화정의 파워타임에서 IQ 측정 결과가 나왔지만 진위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공부능력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참고로 서장훈의 아버지는 국내 유명 대기업 이사직을 맡았던 분이다. 서장훈의 평균기록 중 국내선수로서 드문 예로 시즌 평균기록 더블더블을 네 번이나 기록하였다. 또한, 평균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다. 서장훈 외에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는 하승진으로 한 차례 기록하였다.
한국 프로농구 역사에서 외국인 선수를 제치고 리바운드 타이틀을 따낸 유일한 센터이기도 하다.
선수 시절
아마추어 시절(연세대학교)
1993년에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서장훈은 1993-94 시즌 농구대잔치에서 데뷔하였습니다. 그는 1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대학 팀들의 인사이더와 실업팀의 국가대표급 센터들을 완전히 압도하며 농구 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하였습니다.
당시 한국 농구계에서 서장훈만큼의 키를 가진 선수는 한기범과 정경호 두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장훈만큼의 힘, 기술, 민첩함, BQ를 갖춘 선수는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한기범의 키에 김유택의 기량을 가진 선수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킨 한국 농구 역사상 유일한 선수는 김주성과 서장훈입니다.
서장훈은 당시 연세대가 상무와 결승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상무는 이상민, 조성원, 문경은 등 강력한 멤버를 보유했지만 연세대의 서장훈을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상무는 패배하고, 서장훈은 다시 한 번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어낸 것입니다.
서장훈은 황성인, 김태현, 조상현, 조동현 등과 함께 다시 연세대를 최강 팀으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 후 결승에서 상무와 대결하여 승리하였으며 이로써 다시 한 번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어내게 되었습니다.
프로 시절(1998~2013)
청주/서울 SK 나이츠
서장훈은 신인으로 SK 나이츠에 입단한 후, 현주엽과 함께 팀을 우승으로 이끌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선수는 개인적인 스탯만을 쌓고 팀 시너지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SK 나이츠는 '시즌 전엔 우승 못하면 바보, 시즌 끝나면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라는 전통 첫 장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시즌, SK가 현주엽을 조상현과 트레이드하고 황성인, 로데릭 하니발, 재키 존스를 합류시키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서장훈은 이들과 함께 99-00 시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끄며 MVP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서장훈의 강력한 존재감은 외국 선수와 대결할 때도 드러났으며, 때로는 외국 선수를 압도하기도 하였습니다. MVP를 수상한 1999-00시즌에서 그의 성적은 외국인선수상을 탄 맥도웰과 거의 비슷하였습니다.
2001-02 시즌에 서장훈은 만신창이던 SK 나이츠를 이끌고 4강에서 KCC를 격파하고 결정전에서 최고 전력을 자랑한 대구 동양 오리온스와 맞서 7차전 접전까지 이끈다며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서장훈은 김민수가 기록을 갱신하기 전까지 SK의 개인 최다득점자로 남아있었습니다. 김민수가 9시즌 동안 노력하여 기록 경신에 성공한 것과 비교해볼 때, 서장훈이 단 4시즌 만에 같은 기록을 세운 것은 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서울 삼성 썬더스
2001-02 시즌이 종료된 후, 서장훈은 FA 자격으로 서울 삼성 썬더스로 이적하였습니다. 이는 팬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농구대잔치 시절 서장훈에게 거친 플레이를 가한 삼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적 당시,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당사자들인 이창수와 박상관 두 선배가 팀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삼성행의 가능성을 거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반전이 일어나서, 서장훈은 결국 삼성으로 이적하였습니다. 등가교환을 위해 당시 삼성은 우지원을 보호선수에서 제외하였고, 그로 인해 우지원과 나름 전력급 백업 센터인 이창수와 박상관도 동시에 팀을 떠났습니다.
서장훈의 합류로 서울 삼성은 9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의 길을 열었습니다. 05-06 시즌에는 결국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하는 기쁨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목 부상 재발로 인해 그의 상징인 목 보호대를 차기 시작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상을 극복하여 05-06 시즌에는 결국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영광까지 안게 되었습니다.
저니맨 시기(2007~2013)
서장훈은 KCC에서 첫 시즌에 팀을 정규 시즌 2위로 이끌었지만, 4강에서 삼성에게 패배하였습니다. 다음 시즌에는 하승진의 등장으로 출전 시간이 줄어들자, 서장훈은 트레이드를 요구하였고 이로 인해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전자랜드에서는 서장훈의 활약으로 대반전을 이루어 내며 팀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는 은사 최희암 감독과 함께 전자랜드를 6강 진출시켰고, 유도훈 감독이 된 후에도 문태종-허버트 힐과 함께 전자랜드를 정규리그 준우승으로 이끄는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2010-11 시즌 후 FA 자격을 얻은 서장훈은 연봉 2억 5천만원에 인센티브 1억원을 더해 총 3억 5천만원에 한 해 동안 계약하여 팀 잔류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LG 세이커스의 이현민+강대협과 사인 엔 트레이드 형식으로 LG 세이커스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LG에서의 경력은 좋지 않았습니다. 문태영과 롤 겹치고, 애런 헤인즈 위주로 공격하는 LG에서 그의 자리가 마땅치 않았으며, 수비 면에서 송창무가 어느 정도 각성한 상황에서 장신 선수 수비에 굳이 필요 없어진 상황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부상까지 겹치면서 시즌을 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은퇴
서장훈은 결국 전창진 감독의 부름을 받아 연봉 1억 원에 kt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는 2012-13 시즌 이후 은퇴를 발표하고, 연봉 전액과 사비 1억을 더해 사회 기부를 약속하였습니다. 그 자신은 은퇴식을 원하지 않았지만, kt는 그의 농구 선수 생활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은퇴식을 준비하였습니다.
2013년 3월 19일, KCC와의 홈 경기에서 서장훈의 은퇴식과 은퇴 경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는 이날 경기에서 놀라운 33득점이라는 기록을 남겼고, 마지막 득점까지 달성하여 그의 길고도 풍요로웠던 농구 인생을 마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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