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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농구선수 스토리

한국의 찰스 바클리 포인트 포워드 먹방 유튜버 '현주엽'

by hwani’s 2021. 2. 15.

목차

    한국의 찰스 바클리 포인트 포워드 '현주엽'

    목차
    1. 프로필
    2. 경기 스타일
    3. 선수 생활

    프로필

    현주엽은 1975년 7월 27일에 태어난 대한민국의 농구 선수이며, 키는 193cm, 체중은 110kg입니다. 그는 현역 시절에 한국 농구의 주요 선수로 활약하였으며, 특히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그 후 지도자로 전향하여 창원 LG 세이커스의 감독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현주엽은 전성기 때 한국의 찰스 바클리로 불렸으며, KBL에서 포인트 포워드라는 포지션을 정립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부상과 여러 가지 불운으로 인해 그의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은퇴하게 되어 비운의 선수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의 별명은 '매직 히포'입니다.

    경기 스타일

    현주엽은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득점과 리바운드를 영리하게 만들어내는 능력이 일품이었습니다.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파워포워드 포지션에서도 탑 클래스로 자리매김하게 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여 골밑 플레이어로 활약하면서 체중이 많이 늘었지만, 그의 운동능력과 스킬은 여전히 유지되었습니다.
    현주엽의 주요 공격 옵션은 스핀 무브에 이은 돌파와 점프슛입니다. 그는 힘과 드리블을 바탕으로 골밑까지 파고들고, 스핀 무브를 통해 수비를 따돌린 후 쉽게 득점을 올렸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이런 방식으로 중국 수비를 완전히 깨트렸고, 결국 역전승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러나 현주엽의 진가는 게임 리딩 능력에 있습니다. 워낙 드리블과 패싱 센스가 좋아서 종종 포인트 포워드로 기용되기도 하였습니다. 2004-05 시즌 KTF 시절에는 포인트 포워드로서 그의 진가가 제대로 발휘된 순간입니다.
    그러나 부상과 포지션 확립 문제로 인해 현주엽의 재능이 오래 가지 못한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잠재력과 기여도는 한국 프로농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선수 생활

    현주엽과 서장훈은 휘문중학교 시절부터 같이 농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존재감이 없었지만, 기본기를 다지고 폭풍성장하면서 잠재력이 폭발하였고, 이로 인해 휘문고등학교는 무적의 팀이 되었습니다.
    서장훈이 졸업한 후에도 현주엽은 혼자서 팀을 이끌며 전성기를 이어갔습니다. 그들은 친한 사이였지만, 선수로서의 경쟁 의식은 매우 강했습니다. 고려대학교에서 현주엽을 영입하는 과정도 단순했습니다. "너, 연세대 가면 서장훈 그늘에 가린다."라는 한마디로 결정되었습니다.
    1997년 한국 프로농구가 출범하면서 드래프트 원칙이 세워졌습니다. 1993년 입학생인 서장훈은 1년 유학으로 인한 공백기가 있어 졸업 시기는 같았지만, 거액의 계약금을 받아 자유롭게 팀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현주엽은 드래프트 제도에 의해 자신의 마음대로 팀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격렬하게 반발하였으나 결국 제도를 받아들여 청주 SK 나이츠에 입단하여 서장훈과 같은 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학 무대를 평정한 슈퍼루키 2명, 현주엽과 서장훈을 동시에 보유하게 된 SK 나이츠는 우승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실제 시즌이 시작되고 보니 두 선수의 시너지 효과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양쪽 모두 평균 득점 20점을 상회하는 준수한 성적을 보였지만, 팀 호흡은 맞지 않아 하위권에 그친 것입니다.
    199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조상현과 현금을 포함한 거래를 통해 골드뱅크로 이적한 현주엽은 새로운 환경에서 에이스로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만능 포워드로서의 자질을 유감 없이 발휘하며 평균 어시스트가 거의 포인트 가드 수준인 7.6개와 5.0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방의 의무는 불가피하게 찾아왔고, 실제 신장이 공식 프로필보다 작아 군면제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여 상무에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현주엽은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 남자 농구 대표팀 멤버로 금메달을 딴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군복무 중이던 현주엽은 결정적인 순간에 동점 슛을 성공시켜 한국 남자 농구가 20년 만의 아시안 게임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군복무중인 선수에게 바로 면제를주는 병역특례 제도가 없어 계속해서 상무에서 복무를 마쳤습니다.
    전역 후 현주엽은 코리아텐더로 돌아와 '포인트 포워드'로 활약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무릎 상태는 이미 좋지 않았고, 외국인 선수들과 맞서야 하는 4번 자리에서 점점 투쟁력을 잃어갔습니다.
    그는 어시스트에 주력하는 다재다능한 포인트 포워드였지만, 점점 득점력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05 시즌에는 평균 14.2득점과 어시스트 7.8개를 기록하여 활약하였고, 이러한 성적으로 FA 가치가 높아졌습니다.
    신선우 감독은 현주엽의 가치를 주목하여 FA로 영입하였으나, 결국 그의 무릎 상태가 나아지지 않아 원하는 성적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현주엽은 LG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현주엽은 무릎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2009년에 수술을 받았으나, 재활 도중 결국 선수 생활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2009년 6월 24일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하였습니다.
    화려했던 현주엽의 명성에 비해 그의 경기력은 젊은 시절처럼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아시안 게임에서 국가 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 그의 선수 생활 중 최고의 영광이자 위안거리로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