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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농구선수 스토리

모비스의 영구결번 잘생긴 외모를 소유한 3점 슈터 '우지원'

by hwani’s 2021. 2. 3.

목차

    모비스의 영구결번 잘생긴 외모를 소유한 3점 슈터 '우지원'

    목차
    1. 프로필
    2. 경기 스타일
    3. 선수생활
         3-1. 아마추어 시절
         3-2. 프로시절
    4. 모비스의 영구결번

    프로필

    우지원
    - 생년월일 : 1973년 9월 14일, 키 : 191cm, 체중 : 85kg
    - 대한민국의 전직 농구선수.
    - 2021년 현재 농구해설가 겸 방송인으로 활약중인 인물. 잘 생긴 외모로 마지막 승부 세대의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던 선수.
    - 현역 시절에는 웬만한 연예인 보내버릴 얼굴로 소녀팬들을 많이도 끌어모았으며, 이 얼굴 때문에 실력이 평가절하되는 경우도 있지만, 슈터, 특히 3점슛 능력은 전설급. 외모 때문에 실력이 저평가되는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 안정환의 경우를 생각하면 됨.

    경기 스타일

    선수의 외모가 덜 매력적이었다면 평가는 아마 좀 더 호의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실력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며, 일부는 그를 단지 국내 경기에서만 활약하는 슛 전문가라고 비난했다. 실제로 국제 대회에서는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그의 키는 절대로 작은 편이 아니었으나, 몸싸움이나 점프력은 별로였고, 드리블과 패스 능력도 특별히 뛰어나진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너무 예쁘게만 농구를 한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성장기에도 팀 성적은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결국 스팟 업 3점 외에 별로 언급할 만한 것이 없었다. 원래 포지션은 센터였으나, 키가 크게 자라지 않아서 이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조언을 받자, 지문까지 다 닳아 없어질 정도로 열정적인 슛 연습을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부드러운 이미지를 가진 선수였으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꾸준한 노력과 인내심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런 면모는 만화 '슬램덩크'의 캐릭터 신준섭과 유사하다. 우지원은 철저한 자기 관리로 프로 생활 중 거의 모든 경기에 출전하였고, 마침내 한국 대표 외곽 슛터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실력은 많이 저평가되었다. 프로 입단 후 꾸준한 득점 기록을 낼 수 있던 것은 단순히 3점 슛만 쏘는 반쪽짜리 포워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지원은 전성기 시절 경기당 약 3개의 3점 슛을 성공시켰다. 나머지 점수는 돌파와 점프 슛으로 얻었다.
    은퇴 시즌인 2009-10 시즌에는 3점슛 성공률이 무려 51.5%로, 그가 탁월한 슈터였음을 증명한다.
    은퇴 후 그의 평가는 더욱 상승하였으며, 은퇴 선수 올스타 경기에서 길어진 3점슛 거리에서도 쉽게 득점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그의 실력을 인정한 팬들이 많았다.
    우지원은 다른 슈터들에 비해 슛 기회를 찾는 움직임은 부족할 수 있지만,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3점 슛 능력은 어느 선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선수 생활

    아마추어시절

    경복고에서 같은 학년인 전희철과 함께 핵심 역할을 했던 선수였다. 대학 입학 과정에서는 전희철과 길이 달라졌지만, 대학 시절이나 현재도 둘은 친구 사이다. 그는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였고, 재미있게도 그의 전공은 법학이었다. 이는 체육 특기생 배정 문제로 다른 학과에 배치된 결과였다. 2학년 때 농구대잔치에서 최희암 감독의 지도 아래 연세대가 대학 팀으로서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면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선수였다. 외곽에서 문경은과 함께 쌍둥이 포워드로 활약하며, 문경은 졸업 후에는 김훈 동기와 함께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였고, 잘 생긴 외모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상민의 졸업과 서장훈의 유학으로 핵심 선수들이 떠나면서 94년에는 전력 약화가 커졌으나, 4학년 때와 주장으로서 후배들을 이끌며 골밑 플레이와 몸싸움, 리바운드를 하며 온갖 상황에서 활약해 나갔다. 그 해 연세대는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한 기아자동차를 이기고 정규리그를 승리한 고려대와 연장전까지 가며 8승 5패라는 예상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으며 준결승까지 나아갔다.
    대학 시절 그 이름 자체가 스타였으며, 연세대 출신인 선수들 중심으로 창단된 대우증권 농구단에 지명되어 김훈, 석주일과 함께 프로 데뷔를 했다.

    프로시절

    프로 데뷔 초기에 우지원은 사실상 과소평가 받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돌파력이 탁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한계는 분명하게 드러났고, 대체로 외곽에서 슛을 쏘는 기계적인 역할을 맡았다.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 김동광 감독과 문제를 겪고 있던 문경은을 인천 신세기통신으로 보내고, 대신 우지원을 영입한 이 트레이드는 결과적으로 삼성에게 좋지 않은 결정이었다.
    문경은은 신세기통신을 6강 PO로 이끌었지만, 우지원이 합류한 후의 삼성은 전년도 우승팀에서 6강 PO 진출에 실패한 팀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그 실패의 책임은 주로 우지원에게 돌아갔다. 평균 14.9점으로 나쁜 성적을 거두진 않았으나 결국 한 시즌 만에 서장훈이 서울 SK 나이츠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보상 선수로 지명되어, 당시 중앙대 및 기아자동차를 지도하던 그의 전 학교 감독인 최희암 감독이 이끄는 모비스와 김영만과 맞트레이드되었다.

    모비스의 영구결번

    모비스에 합류한 이후, 우지원은 최희암 감독의 전적인 지원 아래 팀의 주축 선수로 활동하였다. 2002-03 시즌에는 평균 15점, 2003-04 시즌에는 평균 20점을 기록하며 그의 실력이 확실함을 입증했지만, 수비력은 다소 약했고 여전히 외곽 슛 외에는 크게 돌파하는 능력이 없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가 주역으로 활약한 시기는 모비스 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우지원은 자신의 농구 스타일을 철저하게 변화시켰다. 과거에는 코트에서 귀공자나 황태자처럼 슛 위주의 개인 중심 플레이를 보여주었으나, 철저한 팀 플레이어로 변모하였다.
    후배 양동근이 팀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을 인정하면서 식스맨으로서 벤치에서 후배들을 격려해주고, 승부처에서 제한된 역할로만 나서며 리바운드와 수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변화된 우지원의 모습은 팬들 사이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 점은 데이비드 베컴과 비슷한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 베컴 역시 예쁜 외모와 달리 강인한 플레이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다.
    좋은 후배들인 양동근과 함지훈 등과 함께 하면서 우지원은 프로농구 정상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가 식스맨 상을 수상한 2006-07 시즌에 처음으로 우승 반지를 차지하였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내왔다.
    나이가 들면서 식스맨으로서의 활약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벤치에서 팀의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은 여전히 그에게 맡겨져 있었다.
    2009-10 시즌에 다시 우승 반지를 차지하며 그 해를 끝으로 은퇴하였다. 기아자동차의 색깔이 완전히 사라진 모비스 팀에서는 새로운 상징이 필요했고, 한때 팀의 주축이었던 우지원은 팀을 위해 자신을 바친 선수로서 그런 새로운 상징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2010-11 시즌 개막전에서 우지원은 팀의 두 번째 영구결번(10번)을 수여받았으며, 이는 동년배인 농구대잔치 선수 중에서 가장 명예롭게 은퇴한 선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