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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이클조던 한국 농구 레전드 ' 허재 '

hwani’s 2021.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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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이클조던 한국 농구 레전드 ' 허재 '

목차
1. 프로필
2. 경기 스타일
3. 선수 경력
     3-1. 실업농구 시절
     3-2. KBL 출범 후
4. 은퇴

프로필

허재는 1965년 9월 28일에 태어난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이며, 키는 188.3cm, 체중은 87.3kg입니다. 그는 현역 시절 포인트 가드와 슈팅 가드 포지션에서 활약하였으며, 국가대표로서 스몰 포워드와 파워 포워드, 대학 시절에는 센터까지 소화하였습니다.
허재는 신동파, 이충희와 함께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플레이어로 자주 언급되며, 한국의 마이클 조던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별명은 '농구대통령'입니다.
현재 어린 세대들은 그를 재미있는 예능인으로 알고 있을 수 있지만, 현역 시절 그는 한국 농구를 비롯해 아시아 농구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NBA 선수들이 많이 참가하였던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환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활약으로 인해 허재는 전설적인 선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경기 스타일

허재는 그의 기본기에 충실한 드리블부터 페이크 동작을 섞은 화려한 드리블까지, 다양한 드리블 기술을 능숙하게 사용하였습니다. 비하인드 백 드리블, 유로스텝, 순간적인 스핀 무브, 크로스오버 등의 기술을 소화해냈습니다.
왼손잡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을 매우 잘 사용하여 양손으로 자유자재로 공을 다룰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좌우 어디로든 돌파할 수 있었으며, 그 후에는 양손으로 레이업을 올렸습니다. 그의 특기인 높은 점프와 체공 시간을 이용한 더블 클러치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실력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드리블과 스피드를 살려 볼을 받자마자 단독 속공으로 치고 나갔으며, 이 때 상대방 수비수들은 파울이 아니라면 그를 막기 어렵습니다.
패스 역시 허재의 강점 중 하나였습니다. 돌파능력과 연계하여 수비수를 모은 후 밖으로 패스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안정적인 엔트리 패스, 감각적인 노룩 패스 등 다양한 패스를 보여주었습니다.
운동능력만 따지면 허재 이상의 선수들이 있고, 키만 따지면 허재급 선수가 여럿 있지만, 운동능력과 신체조건의 조화로서는 20년 넘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평가됩니다.
국내농구가 아니라 해도 슬로베니아 출신 NBA 마이애미 히트 주전 포인트 가드 고란 드라기치는 신장과 몸무게 그리고 왼손잡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유형의 성격을 가진 선수입니다.

선수 경력

실업 농구 시절

허재는 실업팀들이 그를 데려가고자 몇 억의 계약금을 제시하였지만, 대학 선배인 김유택과 한기범이 있는 기아자동차로 입단하였습니다. 그 때의 기아는 이미 연세대와 중앙대의 특급 선수들을 데려와 강력한 팀을 구성하고 있었으며, 허재가 합류함으로써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기아는 그 해 농구대잔치에서 우승하며 무적의 팀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1989년부터 1991년까지 기아와 허재의 무적 시대가 계속되었습니다. 1990년에 유재학이 은퇴하여 자리가 비어 있었지만, 강동희가 그 자리를 잘 메워 '허동택' 트리오를 결성하여 기아는 점점 강력해졌습니다.
1995-96 시즌에 고려대와 상무 등 다른 강력한 팀들이 나타나면서 팬들은 이제 기아의 시대가 끝난 것일까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김유택 주도로 조용히 준비한 결과, 결국은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6년에 음주운전으로 인해 면허 취소 및 체포된 사건으로 인해 선수 자격 정지 및 국가 대표 자격 영구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음주 파동을 일으켜 6개월간 자격 정지를 받았던 직 후에 발생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프로농구 KBL 출범 전인 1996-97 시즌에 출전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추어 선수로서의 정지였기 때문에 프로농구 선수로서는 문제 없이 경기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몇 년 후에 영구징계가 해제되면서 허재는 1999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KBL 출범 후

허재는 1997년 프로농구 원년 시즌에 포인트 가드부터 스몰 포워드까지 모든 역할을 수행하며 뛰어난 활약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팀 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점점 줄어들었고, 이에 대해 허재는 반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인 최인선은 허재 없이도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내며, 결국 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음을 증명하였습니다.
97-98 시즌, 허재는 기아자동차를 떠나려 결심하였으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현대와 부상 등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허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짜내어 싸우었습니다. 결국 우승은 하지 못했으나, 챔피언결정전 MVP는 그가 받게 되었습니다.
시즌 후에 나래 블루버드로 옮겨간 허재는 여전히 활약하여 팀을 리드하였지만, 나이 때문에 전성기처럼 계속해서 활약하기 어렵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겪으면서도 승리를 위해 계속해서 코트 위에서 버텼습니다.
많은 변화와 도전 속에서 김주성과 함께 최고의 패스를 공급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여 마침내 우승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부상으로 제대로 숨쉬지 못한 상태에서 벤치로 돌아갔던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혔으며, 마침내 팬들의 연호 속에서 우승을 맞이하는 순간이 왔습니다.
우승 후 구단의 만류로 1억 6천만원 연봉으로 1년 계약 연장하여 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은퇴

2004년 3월 8일, 허재는 갑작스럽게 은퇴를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인천 전자랜드와의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가 끝난 직후이었고, 그는 플레이오프가 끝나면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으러 갈 계획임을 밝혔습니다. 이 소식에 팬들은 큰 충격과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그 후 4월 10일에 있었던 운명의 7차전에서 허재는 팬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았고, 프로에서 세 번째로 등번호 9번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주전으로 출전하여 최선을 다하였지만, 결국은 우승하지 못하였습니다.
은퇴한지 하루 만에 개인 팬들이 모아 일간스포츠 신문에 전면광고를 게재하여 허재를 위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안녕, 나의 영웅"이라는 제목 아래 "고맙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시간들 참 많이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농구를 사랑한 만큼, 나도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제, 다시 돌아올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에게서 들어야 할 신화(神話)는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문구가 실려 국민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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