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2008년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 방화 사건
목차
1. 사건 개요
2. 사건 경위
3. 사건 요약
4. 비효율적인 진화
5. 복구
사건 개요
2008년 2월 10일 저녁, 70대 남성 채종기가 국보 1호인 숭례문에 방화를 저질러 소실된 사건. 이 사고로 말미암아 숭례문 2층 문루의 90%, 1층 문루의 10%가 소실되었다가 5년 뒤 2013년에 복구되었다.
사건 경위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 즈음 원인 모를 불이 흰 연기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여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켰고 불씨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 현판을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고 화재 진압에 총력을 다했으나 2월 11일 오전 0시 25분 즈음 2층 누각 전체가 불에 휩싸이고 화재 4시간 만인 오전 0시 58분 즈음 지붕 뒷면이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2층이 붕괴되었다.
이어 바로 1층에 불이 붙어 새벽 1시 55분 즈음에는 숭례문의 고주와 평주, 주심도리를 비롯한 기본 뼈대들과 누각을 받치고 있는 석반을 남긴 채 모두 붕괴된 다음 5시간 만에 1층 누각의 90%, 2층 누각의 10%만 남긴 채 소실되었다.
당시 숭례문을 관리하고 있던 업체의 직원은 퇴근하고 CCTV만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이 때문에 초기에 화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방화범이 숭례문에 불을 붙인 장면을 지나가던 택시 기사가 목격 후 경찰에 신고하고, 용의자를 추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에서 대응을 하지 못하다가, 시간이 조금 경과한 뒤에야 겨우 사태가 파악되었다. 방화 당시 쓰인 것은 겨우 시너 3통과 라이터 하나였다.
사건 요약
20:45 방화범이 사다리를 이용해 숭례문으로 진입
20:47 KT 텔레캅이 남대문에 설치한 센서에 뭔가 반응. 경찰서 및 소방서에 연락하지 않음.
20:50 화재 신고
20:53 중부소방서 회현 소방파출소 도착. 화재 진압의 FM대로 해체하며 진화하기로 계획
20:57 텔레캅 직원 도착. 현장에서는 진화 작업 중
20:59 문화재청에 화재 통보. 답변 국보가 훼손될 수 있으니 신중하게 진화
21:30 화재 진압된 것으로 결정. 잔화 처리. 발화점 미확인
21:35 문화재청, '화재진압이 우선' 일부 훼손 승인
21:55 화재 비상 2호
22:32 화재 비상 3호 - 서울 소방재난 본부장 지휘
23:10 숭례문 현판 회수
23:20 화학식 소화제 사용
23:50 지붕 해체 개시
00:25 2층 누각 전체 발화
00:58 2층 붕괴
01:55 대부분 붕괴
사건 당일 많은 사람들이 밤에 보도된 숭례문 속보를 보고 별일 없겠지'라고 생각하고 자다 일어났더니 숭례문이 전소되어 충격 받은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방화범 : 채종기
출생 : 1939년 2월 28일 경상북도 칠곡군
방화범인 채종기는 철학관을 운영하던 70대 남성으로 택지개발에 따른 자신의 토지에 대한 보상액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었다. 해당 건설사가 땅과 건물 값의 감정 평가를 토대로 9,680만 원을 제시했는데 이 인간은 밑도 끝도 없이 4, 5억을 내놓으라고 고집을 부렸다.
2006년 4월 26일에는 같은 이유로 창경궁에 불을 질러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300만 원을 선고받은 적도 있었다. 즉, 문화재 방화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원래는 종묘에 불을 지르려 했는데 경비가 삼엄하여 표적을 숭례문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문화재를 계속해서 방화한 까닭은 경비가 허술해 접근하기 쉽고 인명 피해가 나지 않으며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채종기는 현장 검증 자리에서 당시 대통령에게 하소연해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뜻으로 '노무현의 잘못이 99.9%, 내 잘못은 0.1%', '그래도 인명 피해는 없었잖아. 문화재는 복원하면 된다'라는 망언을 하여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검증이 끝나고 "문화재를 훼손해 국민들께 죄송하다"라는 말을 했다. 재판을 받은 채종기는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이 구형되었으며 1심 판결에서 징역 10년을 선고 받고 형이 과중함을 들어 항소했으나, 2009년 8월 31일, 서울고등법원은 항소를 기각하며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여 복역하게 된다.
채종기는 범행 2년 후인 2010년 2월 복역 중 처음으로 인터뷰를 가졌는데, 2년 전 사건에 대해 묻자 '내가 그때 바보짓을 했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10년 뒤 2018년 2월에 만기출소했다.
비효율적인 진화
화재 신고는 비교적 일찍 되었지만 그 진화 과정이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소방 인력의 전통 목건축 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진화를 위해 노력했던 소방관들 개개인의 잘못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21세기 대부분의 건축물이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진 시대에서 제도적으로 전통 목건축에 대한 소방 인력 교육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소방관들이 돌입하기에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밖에서 소방차 32대로 물을 퍼부었지만 지붕이 완전 방수라 2층의 지붕 내부에 붙은 불을 끌 수가 없었다. 목건축은 나무가 물에 닿으면 썩으므로 지붕 방수에 엄청 신경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기와를 걷든가 서까래에 구멍을 뚫든가 해서 불이 붙은 부분에 직접 물이 닿게 했어야 한다고 하지만 당시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은 물론 경찰, 서울시, 현장 생중계를 하던 방송사 등 아무도 이를 몰랐다. 문화재청의 전문가들은 너무 늦게 도착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소방방재청에선 이런 고건축물 화재에 대비한 훈련을 전혀 한 적이 없어서 소방관들은 지붕이 완전 방수라는 걸 몰랐다고 한다. 황평우 문화재연구소장 등 몇몇 민간 문화재 전문가가 TV중계를 보고 급하게 연락을 시도하고 현장에 나왔으나 모두 무시 당했다고 한다. 당시 전국의 수많은 유적지에도 소화기만 비치되어있지 화재 상황에 대비한 구체적인 매뉴얼 따위는 전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소방관들이 내부에서 천장에 구멍을 뚫고 물을 뿌리려고 했으나 붕괴 위험이 있어 포기했다고 한다. 전통 목건축물은 나무를 겹겹이 쌓아서 만들어진 것이고 무거운 지붕의 무게로 기둥을 누르는 구조이기 때문에 기둥 등 구조체가 타게 되면 붕괴하기가 쉽다는 이유였다.
복구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예 사라지다시피한 2층과 달리 1층 누각은 전부 불탔을지언정 상당 부분이 구조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과 숭례문 안에 있던 가치 있는 문화재의 상당수는 1960년대 해체 보수할 때 꺼내서 누각 안에 보관하고 있다가 몇 년 전에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서 무사하다는 점이다.
양녕대군이 썼다고 알려진 현판은 떼낼 시간이 없어서 연결 부분을 톱으로 절단하여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약간 파손되긴 했지만 지켜냈다. 현판을 떼어낼 당시 조심스럽게 떼지 않고 바닥에 떨어뜨려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현판의 엄청난 무게로 몇몇 사람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쩔 수 없었음이 알려졌다.
복구까지는 짧게는 1년 반에서 2년 정도로 예상되었지만 치명적인 문제는 광화문을 보수하느라 목재로 사용 가능한 정도의 수령(樹齡)이 된 여분의 국내산 소나무가 존재하지 않았다. 건축에 쓰이는 목재는 크기가 적당한 나무도 있어야 하지만 벌목 후 수년 동안 건조를 시켜야 하기 때문에 바로 조달할 수가 없다. 그래서 광화문을 다 분해해 놓은 상태에서 거기에 쓰일 목재를 숭례문으로 돌려서 쓰고 있다고 한다. 목재가 부족한 이유는 6.25 전쟁 때문에 국내에 목재로 쓰일 만한 소나무 씨가 말라버려서이다. 다행스럽게도 태조 이성계의 5대조가 안장된 준경묘(濬慶墓) 경역의 금강송 20그루를 숭례문과 광화문 복원에 사용하는데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 동의해 이를 벌채한 것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소나무를 기증하겠다는 고마운 시민들 덕에 재목 충당은 별 문제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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