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김대중 납치사건(1973년 8월)
목차
1. 사건 개요
1-1. 납치 과정
2. 사건 이후
사건 개요
1972년 10월 유신 후 이듬해인 1973년 8월,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유신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재야 정치인 김대중에게 저지른 납치 및 살인미수 사건.
대담하게도 일본에 있는 김대중을 납치하고, 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 했는데, 그러다 미국 정부에게 배의 위치가 탄로나는 바람에 계획 실행을 포기하고, 결국 김대중은 일본 도쿄에서 실종된 지 닷새째 되던 날 밤에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 앞에서 풀려났다.
납치 과정
1972년 10월 11일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 및 일본 정계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도쿄를 방문하여 체류하다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이후 김대중은 한국 민주 회복 통일 촉진 국민회의, 약칭 '한민통'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으로 취임하여 미국과 일본의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었음.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 객실중 가장 위층인 22층 2212호에서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당수 양일동, 김대중의 조카뻘이자 국회의원 이던 김경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담화를 나누고 자유민주당의 중의원인 키무라 토시오와의 약속장소로 출타하던 김대중이 한국인으로 보이는 괴한 5명에게서 납치.
범행 현장에는 백두산 담배, 배낭, 휴지, 노끈, 마취제, 탄창 등의 유류품이 남아 있었음. 지하 주차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엘레베이터 에서 마주친 일본인 남녀에게 김대중은 "납치된다, 살려주시오" 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은 야쿠자의 싸움인 줄 알고 엮이기 싫다는 생각으로 외면해 버리면서 김대중은 그대로 차량에 태워져 실려감. 괴한들은 오사카 또는 고베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 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 가량 달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보트에 태워 30~40분 항해한 뒤, 정박해 있던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536톤 용금호에 김대중을 인계.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김대중을 배밑 쪽 선실로 끌고 가 손발을 다시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붕대를 감았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 kg의 바위를 매달고, 등에 판자를 대어 몸과 함께 묶었다.
당시 미국 CIA는 납치된 김대중의 소재를 24시간 안에 파악하고자 별도의 액션을 취했다. 이 때 주한 미국 대사이던 필립 C 하비브는 CIA 한국 지부장 그레그에게 "박정희는 김대중이 납치된 이후 24시간 동안은 미국의 눈치를 볼 것이니 그 안에 찾아내도록 하라"며 조언했고, 결국 CIA 한국지부 요원들이 김대중의 소재를 찾아냈다.
용금호로 어떤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를 받은 선원들은 갑자기 김대중의 복면을 벗기고 손을 풀어주며 마실 것도 제공. 김대중을 배에 태운 지 53시간 만의 일이었다. 이때 어떤 젊은 선원이 김대중에게 "당신은 왜 해외에서 반국가적인 행동을 하고 다니는 것이오?"라고 물었고, 김대중이 "나는 박정희 정권을 반대한 것이지 국가를 반대한 적이 없소."라고 답하자, 그 선원이 "정부는 국가나 마찬가지요."라고 말했다고 함. 이러한 과정 끝에 김대중을 더 이상 살해할 여지가 없어지자 김대중은 8월 11일 새벽 부산항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해 구급차에 태워지고 수면제에 의해 잠들었다. 잠이 깼을 때는 어느 2층 건물에 있었다. 다시 날이 어두워지자 차에 태워진 김대중은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15분경.
서울로 돌아온 김대중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정이나 남산을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누구나 그들의 소행임을 알아듣게끔 진술. 결국 이후락을 위시한 중정은 김대중의 입을 막기 위해 수사를 이유로 김대중의 사저에 기자 및 외부인 접촉을 차단했고, 일본에도 수사를 이유로 보낼 수 없다는 방침을 외무차관 윤석헌을 통해 보냈다. 이 조처는 두 달도 넘게 10월 26일까지 지속됐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정부 개입설을 부정했다. 일본 경찰이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 관련자들의 출두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 이 때문에 일본에선 주권 침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대두, 한일 정기 각료회의 연기나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 교섭이 취소되는 등 한일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결국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 간의 절충 끝에 김대중의 해외 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 방일 등에 합의, 사건 발생 86일 만에 끝났다.
사건 이후
이 사건에 대해 경찰이 수사 은폐하려는 의혹이 일었다. 사건 직후 박정희에 의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나 아무런 성과 없이 1년 후인 1974년 8월 14일에 내사 중지했으며, 다시 1년 후인 1975년 7월 21일에 내사 종결하면서 그대로 묻혀버렸다. 그리고 수사본부가 작성한 당시 수사 자료를 보면 엄청난 범위를 수사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작 찾은 증거는 전무했다. 당시 수사본부 부본부장이었던 당시 마포경찰서장이었던 이흥세는 실제로 수사본부가 한 수사는 서류조사밖에 없었다고 증언.
또한 당시 여당인 공화당에서는 오히려 사건이 김대중의 자작극이 아니냐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정일형 의원은 국회에서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에게 사건에 대해 질문하면서 “무엇 때문에 한 정권이 개인을 상대로 하여 이토록 심한 피해망상증에 걸려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며 강하게 비판하다가 이에 항의하는 여당 의원들과 몸싸움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게다가 이 사건은 이미 국제적으로 알려진 상황이라서 유신정권은 욕을 잔뜩 먹었고, 납치사건이 일어난 해인 10월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이 동맹휴학을 하고 유신반대 연좌데모를 시작하면서 유신반대운동이 시작. 이에 박정희 정권은 시위주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는 걸로 맞섰지만 이미 불붙기 시작한 유신반대운동은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 등 지방까지 번졌고 12월이 되자 김수환 추기경, 장준하, 함석헌 등의 주도로 개헌청원 100만 서명운동을 벌이고, 이듬해 1974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를 발령. 그러나 계속해서 저항이 계속되었고 이에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연달아 발령하였고, 그 해 광복절 날 영부인 육영수가 박정희의 암살을 시도한 재일교포 문세광의 저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추가로 북한 또한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한다고 선언하였으며 남북관계는 다시 얼어붙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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