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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마섬 (군함도). 일본은 왜 솔직하지 못 하는가?

hwani’s 2022.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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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마섬 (군함도). 일본은 왜 솔직하지 못 하는가?

목차
1. 군함도
2. 하시마섬
3. 태평양 전쟁 당시 강제 징용
4. 유네스코 등재

군함도

하시마섬(군함도)는 행정구역상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구 다카시마정)에 소속되어 있는 섬.

나가사키 반도 옆의 관광지로 유명한 다카시마 밑에 조그마한 섬이 2군데 있는데 하나는 나카노시마(中ノ島) 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하시마(端島) 이다. 생긴 것 때문에 군함도(軍艦島, 군함섬)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음.

1960년대까지 다카시마와 함께 일본의 근대화를 떠받치며 광업도시로 번영을 누렸으나 폐광 이후 주민들이 떠나서 지금은 무인도가 됨.

하시마섬

크기가 400m×140m에 면적은 6헥타르가 채 안 되는,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섬이지만 5,000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고, 전성기 때에는 헥타르당 무려 835명이라는 당시 도쿄 23구의 9배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인구밀도를 기록하기도 했음.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되어 석탄을 캐기도 했으나, 석유 때문에 석탄이 도태되면서 1970년대 이후 에너지 정책의 영향을 받아 1974년 1월 15일에 폐광. 폐광 당시 2,000명으로 줄어있던 주민은 3개월 뒤인 4월 20일 모두 섬을 떠남. 폐광되고 난 뒤에도 섬의 소유권은 미쓰비시 마테리얼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1년에 지자체인 다카시마정에 무상 양도되었으며 지금은 나가사키현으로 편입되어 나가사키시의 시유지가 됨. 건물이 노후화되어 폐허가 된 곳이 많아 섬에 오래 머물러 있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2005년 8월 23일 기자들에 한해 특별히 상륙이 허가되어 완전히 폐허가 된 섬 곳곳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어 본격적으로 알려졌고, 이후 2008년에는 나가사키 시에서 조례가 제정되어 섬 남부에 정비된 견학통로에 한해 2009년 4월 22일부터 관광객의 상륙ㆍ견학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견학시설 이외의 섬 전체는 아직까지 출입금지구역이다. 출금 해제 한 달만에 4천 5백명이 넘는 인원이 섬을 방문했으며, 1년만에 약 59,000명이 섬을 방문했다. 또한 상륙하는 데 있어서 바람이나 파도 등 기상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나가사키 시에서는 상륙 가능한 일수를 연간 10일 정도로 예측하고 있다.

 

이 섬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2015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강제 징용

태평양 전쟁 당시 많은 식민지 주민들과 전쟁 포로들이 군함도에 강제 징용되어 끌려왔다. 그 중 조선인은 징용 및 요시다 합숙소 노동자가 도합 500~600명 정도였으며, 자의로 온 조선인 노동자가 추가적으로 80명 정도 있었음.

1986년 일본의 시민단체인 '재일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에서 사료로서 제시한 화장매장인허증에 따르면 1925년~1945년 사이 하시마 탄광에서 총 1,295명이 숨졌으며 이 중 조선인은 122명.

 

섬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당시 조선인들은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지옥문'이라고 불렀으며 섬 자체도 지옥섬 또는 감옥섬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게다가 이들이 받은 대우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고 할 정도.

파도가 들이치는 바닷가 집에 강제로 살게 했는가 하면 햇빛도 안 들어오는 아파트 지하층에서 살게 한 경우도 허다했다고 함. 탈출하려고 시도한 조선인들이 여럿 있었으나 험한 파도에 휩쓸리거나 발각되어 총살당하는 경우가 거의 대다수였고, 기껏 파도를 헤치고 탈출에 성공해도 다다른 곳은 전시 상태의 일본 본토. 즉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

국가 차원에서의 배상 의무는 한일기본조약에 따라 청구권이 청산되면서 사라졌으며 미쓰비시그룹 또한 청구권이 소멸한 상황에서 추가 배상을 진행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법적 상황이 다르다"라는 표현으로 애둘러 말하고 있다.

2015년 5월 초 유네스코 세계 유산 위원회 산하의 민간 자문기구인 국제 기념물 유적 협의회가 하시마 섬을 비롯, 일본 정부가 조선인을 강제 징용하여 건설한 건축물 7곳에 세계문화유산 등재 권고를 내리며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음. 물론 메이지 시대 산업혁명의 상징인 만큼 문화, 역사 가치를 평가하자면 분명 유산으로 오를 만하지만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 사실은 쏙 빼고 유리한 설명만 남겨 놓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

군함도는 메이지 시대의 것은 메이지 40년에 지어진 제방과 바닷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해저 탄광, 아마 섬 밑에 묻혀 있을 무언가들 뿐.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한 양자 협의를 일본 정부에 요청하였으나 일본에서는 현재 응답이 없는 상태. 여러 한국 시민단체들과 일본 내 진보성향 단체들 또한 인권 탄압의 상징인 해당 시설물을 유산으로 등록하는 것은 인류 보편적 가치에 위배되지 않나 우려된다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마리아 뵈머 독일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과 그 외 유네스코 회원국들에 전할 예정이라고 한다. 독일 언론에서도 '공포의 섬'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에 담긴 역사적 문제점을 다루었다.

 

특히 유네스코 측이 하시마 섬의 산업과 근대화 역사 및 문화 가치에만 관심이 있고, 일본 제국이 저지른 전쟁 범죄, 강제 징용, 한일관계에는 전혀 무관심하기에 유네스코를 너무 압박하지 않는 선에서 한국 측의 주장을 어떻게 어필할지가 이번 논란 해결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임.

유네스코 등재

결국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2018년 6월 27일(현지시간) 3년 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군함도'(하시마<端島>) 등 일본 산업시설에서 이뤄진 한국인 등의 강제노역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릴 것을 일본에 재차 촉구하는 결정문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록 당시 일본이 강제징용에 대한 내용을 명시할 것을 조건으로 등록되었으나, 일본이 이를 지키지 않아 2018년 6월 세계 유산 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이를 지적하였고, 유네스코에서는 일본이 강제징용 명시에 관련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며 시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 하시마 섬 강제징용 이행 보고서가 2019년 12월에 제출될 예정이며, 2020년에 유네스코 위원회에서 검토될 예정. 2020년 3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나가사키 군함도를 포함한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을 소개하는 ‘산업유산 정보센터’를 도쿄에 개관. 전시 내용에는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부인하는 증언 등이 포함되어있다.

 

6월 18일 국회 문체위 업무보고에서 전용기 의원은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정보센터의 잘못된 정보전달에 대한 이의제기와 세계문화유산 등재 취소를 요구해, 당시 장관은 공식 서한을 보내겠다고 답했다. 국회 또한 전용기 의원이 발의한 군함도 강제징용 문제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의결하며 일본 정부에 공식 항의에 나섰다.

 

6월 23일 정부는 유네스코에 군함도(端島·하시마) 등 일본 근대산업시설 23곳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취소 가능성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 정부가 이처럼 강경한 대응에 나선 것은 일본이 유네스코에 근대산업시설을 등재하면서 강제징용 등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겠다고 한 약속을 어겼고 역사적 사실도 왜곡했다고 판단했기 때문.

 

결국 2021년 7월, 유네스코는 “일본이 세계유산위원회의 관련 결정문을 아직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 데 대해 강한 유감(strongly regrets)을 표명한다”는 내용을 담은 일본 근대산업시설 결정문안을 12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 유네스코 '日군함도 전시왜곡' 확인…세계유산위 "강한 유감"(종합) 보고서의 내용에는 1910년 이후의 하시마섬에 관한 전체 역사에 대한 일본의 설명이 불충분하며 다수의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 노역한 사실과 일본 정부의 징용 정책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내용과 함께 희생자 추모 조치, 당사국과의 대화 지속 등의 권고등을 담았다. 일본은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그야말로 공개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러자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은 "우리는 유네스코의 조치를 어기지 않았다"고 반발했고, 야마다 히로시 자민당 참의원과 마루야마 호다카 자민당 중의원 역시 이에 대해 반발했다. 그러나 이 결정문은 일본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 그리고 일본도 반론 기회가 있었지만, 국제사회의 역사인식과 일본의 역사인식이 적나라하게 괴리가 크다고 보고, 포기한 것으로 나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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