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1. 사건 개요
1-1. 개구리 소년으로 명칭된 이유
2. 사건 발생
3. 사건 경과
4. 사건 결말
사건 개요
1991년 3월 26일, 대구직할시(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성서 지역에 살던 5명의 국민 남학생들이 인근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동반 실종되었다가, 실종 후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26일에 백골로 발견된 사건. 사건이 발생한 지 31년, 남자아이들의 백골이 발견된 지는 20년이 흘렀지만 현재까지도 범인을 잡지 못한 상태.
범인의 윤곽은커녕 피해자의 신원이나 행방조차 밝히지 못한 채 미궁 속으로 빠진 사건은 전국적으로 많이 보도되었지만, 이렇게 불가사의한 사건의 경우 당대의 이슈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수사 인력의 편중으로 인해 초동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묻힌 경우가 많다. 이 사건은 밀폐되지 않은 산 속에서 5명을 한꺼번에 살해한 범행 수법과 대대적인 수색이 이어졌음에도 윤곽조차 잡지 못한 범인, 알려지지 않은 살해 이유, 그리고 시초부터 마지막까지 불가사의 투성이였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미제사건 중 가장 의문점이 많은 사건을 꼽아보라면 여전히 많은 이들이 하나같이 언급하는 사건 중 하나.
개구리 소년으로 명칭된 이유
정확히는 남자아이들이 도롱뇽 알을 채집하려고 집 근처 와룡산에 올라갔다가 실종되었는데, 사건 초기에 도롱뇽이 개구리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5명의 아이들은 일명 ‘개구리 소년’으로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됨. 개구리 소년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는, 도롱뇽 알을 구하러 나갔다가 실종되었다고 보도하면 당시 개구리와는 달리 도롱뇽을 잘 모르는 전국의 많은 아이들이 도롱뇽에 대해 막연한 공포감을 지니고 괴생명체로 오인할까 봐 일부러 인지도가 높은 개구리로 보도했다고 함. 그리고 개구리와 달리 도롱뇽은 국내 서식지가 제한적인지라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도 아니기 때문에, 개구리 소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다만 사건 당일 5명의 아이들이 가는 길에 만난 친구에게는 탄두를 주우러 간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와룡산에 있었던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에서 흘린 탄피를 주우러 갔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이나 개구리 소년 살인 사건, 혹은 간단하게 개구리 소년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정식 사건명은 대구 성서초등학생 실종 사건이었으나, 2002년 9월 26일에 아이들의 시신들이 발견되면서 대구 성서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으로 변경되었다.
사건 발생
1991년 3월 26일은 지방자치제가 다시 시행된 이후 최초로 전국의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의 지방의원을 뽑는 선거인 1991년 지방선거일이어서 임시공휴일이었다. 아침 8시 무렵, 성서국민학교(現 대구성서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3~6학년 어린이 우철원 군(6학년), 조호연 군(5학년), 김영규 군(4학년)(가장 늦게 발견), 박찬인 군, 김종식 군 그리고 김태룡 군(이 셋은 모두 3학년) 총 6명은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조 군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놀라'라고 핀잔을 줬다. 사건 후에 이 청년은 인터뷰에서 '나 때문에 애들이 죽었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자책했다.
그 뒤, 우철원 군을 비롯한 6명의 아이들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인근 와룡산으로 향했고, 6명 가운데 김태룡 군은 같이 따라가려다가 '위험하니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이 생각났고, 아침밥도 먹을 겸 혼자 집으로 돌아갔고, 덕분에 김태룡 군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범행을 면한 생존자가 되었음. 조호연 군의 형 조무연 군(당시 중학교 1학년)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아이들을 만났는데,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옴.
같은 학교 4학년에 다니던 함승훈 군은 아이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증언을 남겼는데, 와룡산 바로 밑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그는 이날 다른 무리의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소리를 2차례 들었다''고 진술. 성인이 된 함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같이 올라갔던 형들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함 군은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쯤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
부모들은 18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허탕을 치고 19시 50분에 경찰에 신고.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 함.
사건 경과
사건 초기 경찰은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로 인한 앵벌이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엉뚱한 수사 방향을 정하는 우를 범했다. 5명 아이들이 모두 집안 사정이 부유하진 않았어도 별다른 문제없이 화목했기 때문에 가출할 만한 사유가 없었던 데다, 애초에 5명의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일시에 가출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 실종된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가 당시 14살이던 우철원이고 나머지는 모두 갓 10대에 들어선 상황이었다. 특히 박찬인, 그리고 김종식은 각각 11세, 10세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아직 어린아이티도 벗지못한 아이들이 가출이란 엄청난 일을 벌이기엔 나이가 너무나 어리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격적인 수사를 늦추는 계기가 되어 버림.
이 사건이 매스컴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5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군과 경찰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초반에는 수색 인력이 부족해 와룡산 서남쪽과 연못만 수색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가 7월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산하에 수사본부가 차려져 총 25개조에 1조당 25명으로 구성됐고, 이곡동 성서파출소 옆건물에 둥지를 틀었다. 10월 24일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을 겸하면서 대구지역 군경 수천명이 탐침봉까지 들고 와룡산 전체를 뒤졌으나 찾아내지 못함.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1996년 해체 전까지 5년 간 연인원 30만명을 동원하여 산악수색 48차와 일제 검문검색 43차 외에 복지시설 및 종교단체 1천여개소, 가정집 11,000세대를 각각 수색했고, 성서초 졸업생 1,800명과 공단 노동자 19,000여명에게도 수소문해 제보만 570여건이나 됐지만 전부 허사.
다행히 어떻게든 이 사건을 해결해보자는 의지가 강했던 덕분에, 각 기업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찾기 위해 홍보에 진력했다. 그래서 전화카드나 담배갑은 물론 당시 어린이들이 즐겨 보던 만화, 비디오테이프 등에는 어김없이 개구리 소년과 관련된 광고가 삽입되었고, 그 외에 우유나 과자 포장에도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가 인쇄되었다.
특히 포항제철은 대구지방경찰청에 현상금 1천만원을 기탁해가며 전단 80,000장을 임직원과 고객들에게 뿌렸고, 한진그룹도 대한항공과 한진고속 승객 및 임직원, 고객들을 상대로 100만장을 뿌렸다. 럭키도 수퍼타이 등 전 제품에 실종자들의 사진을 붙이고, 수퍼타이 CF '미아찾기 캠페인'을 통해 홍보했으며 국민신용카드도 1991년 11~12월까지 대금청구명세서를 담을 우편봉투에 개구리 소년 찾기 광고를 실었다.
한국담배인삼공사는 미아찾기 캠페인 참여사로서 88담배에 아이들 사진을 삽입했고, 부산택시조합도 1992년 달력에 사진을 실었다. 그 외에 제일제당, 기아자동차(現 기아), 남양산업, 남양알로에(現 유니베라. 1976년에 설립된 건강기능식품 및 화장품 제조회사로 국내 최초로 알로에를 시험재배한 회사), 대도제약(1962년 설립. 혈전 용해 치료제 '용심'과 어린이 영양제 '아토실'로 유명했다. 1997년 삼성정밀화학에 인수) 등지도 사보에 사진 및 명단을 실었다.(참고)
또한 개구리 소년을 주제로 한 영화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1992년 11월 개봉)이나 노래도 제작되었고, MBC 《생방송 여론광장》- '얘들아, 어디있니?' 편(1991년 5월 4일 방영분)을 비롯해 SBS 《그것이 알고싶다》(1993년 3월 21일 방영분), KBS1의 《사건 25시》(1993년 6월 26일 방영분) 등에서 심층 분석하기도 했다. 심지어 대교출판에서 해당 사건을 소재로 한 동화《개구리 잡으러 간 친구들은 어디에 있을까(이기창 저)》를 출간했다.
그러나 이러한 큰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찾지 못했고 결국 영구미제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돌며 자식들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 부모들의 눈물겨운 노력도 허사가 되어 갔다.
1993년 1월에 실종자 부모들이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에게 탄원서를 냈지만, 9월에는 직접 수색을 포기. 1995년에 경찰은 컴퓨터로 만들어진 가상 몽타주를 실은 전단을 2만여장이나 뿌렸고, 이듬해엔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관련 업무를 달서경찰서 수사전담반으로 넘김에 따라 경찰서장이 본부장을 맡고, 수사인력도 총 10명으로 줄었다. 1997년 8월에는 40대 여성이 법정에서 자신이 개구리 소년을 유인 후 암매장했다고 밝혔지만 허위 진술로 판명.
사건 발생 약 10년 후인 2001년 7월에 전남 신안군 지도면 증도의 한 염전에서도 제보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급파됐으나 허위로 판명났고, 그해 10월 22일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가 슬픔을 술로 달래며 살던 게 화근이 되어 간암으로 사망해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사건 결말
2002년 9월 26일, 실종 11년 만에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무근 씨에 의해 5명의 유골이 와룡산 세방골 중턱에서 발견. 이곳은 구 육군 제50보병사단 사격장 부지였으며, 50사단은 이미 1994년에 북구로 이전한 상태였다. 실종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불미골을 중심으로 수색하였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여 벌어진 실책.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이 있어서 탄피가 많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랐다는 제보도 잇따라, 일각에서는 오발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되었다. 발굴 이틀 후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다시 구성해 의욕을 보이는 듯했으나, 경찰들은 11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성급한 수사를 해 빈축을 샀다. 여기서 경찰은 사건 현장을 건드려서 크게 훼손시킨 것으로 드러났는데, 그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에 보도된 영상을 보면 의경들이 삽질을 하고 형사들이 유골을 함부로 마대에 정리해 담아놨다. 이 꼴을 본 서울대학교 법의학과의 이윤성 교수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할 말을 잃었을 정도. 그래서 시신 중 감식반의 현장 감식을 받은 시신은 단 1구뿐.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여러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다만 가장 유력한 범행도구는 용접 후 슬래그를 깨거나 긁어내는데 사용하는 용접망치, 일명 깡깡이망치.
2003년에 대구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했고, 2005년 11월 28일에 유족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촉구했지만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며 2015년엔 내사마저 종결됐기에 이제 와서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처벌할 수 없다. 공소시효를 무시하고 수사가 가능한 경우도 존재하는데 이를 공소시효 배제라 한다. 하지만 범인에 대한 더 이상의 단서가 없어서 수사가 불가능하다. 현재까지도 범인 또는 범인을 아는 사람이 자수하지 않는 이상 잡힐 가능성조차 안 보이며 후술하겠지만 설령 다른 사건으로 인해 이미 체포 후 수감되었는데 그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져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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