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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건사고/우리나라 해결된 사건 사고

대한민국 해군이 북한 해군을 거의 압살한 제1연평해전

by hwani’s 2022. 12. 11.

목차

    대한민국 해군이 북한 해군을 거의 압살한 제1연평해전

    목차
    1. 사건 개요
    2. 제1연평해전의 설명
    2. 제1연평해전 그 이후

    사건 개요

    대한민국 해군이 북한 해군을 거의 압살한 해전.

     

    1999년 6월 15일 오전 9시경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한 해군의 도발로 벌어진 남북 함정간의 해전으로 당시 한국 해군은 7명이 부상, 고속정이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반면 북한 해군은 어뢰정 1척과 경비정 1척이 침몰하고 다른 경비정 3척도 심각한 타격을 입고 퇴각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1연평해전의 설명

    꽃게철에 북한 어선이 대규모로 NLL근처에서 조업을 하자 북한군이 이를 감시하러 내려왔고 그 결과 한국군과 대치하는 일이 일어났다. 한편, 이러한 일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한다. 때마침 군은 서해를 안보 취약지대로 설정하고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북한은 1999년 6월 6일부터 15일까지 NLL 근처를 들락거렸는데 6월 15일 오전 북한 경비정 4척이 어선 20척과 함께 북방한계선 남쪽 2㎞ 해역까지 내려왔다. 북한은 1999년 6월 6일부터 15일까지 매일 NLL을 넘어와 몇 시간씩 한국 영해에 머물면서 한국군을 도발하고 있었는데, 이는 실질적인 남북 해상경계로 인식되어 왔던 NLL을 무시하려는 북한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한국 해군은 고속정과 초계함 10여 척을 동원하여 선체를 직접 충돌시키는 밀어내기로 북한 함정을 NLL밖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 고속정이 북한 고속정에 올라타는 일이 벌어졌고 자칫 잘못했으면 큰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참수리 325정도 북한 고속정을 함수로 들이박았는데 함교에서 북한군의 시체와 생존자들이 총을 겨누는 모습이 가까이서 보였다고 한다.

     

    오전 9시 28분, 충돌공격을 받은 북한 청진급 경비정 1척이 갑자기 25㎜ 기관포로 공격을 시작하자 다른 함선도 이어서 공격에 가담하였다. 이 과정에서 참수리급 고속정 325호 정장 안지영 소령(당시 대위)을 비롯하여 당시 325호에 탑승한 장병들 중 일부가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325호는 곧바로 40mm 기관포와 20mm 시벌컨으로 응사를 가했다. 이때 북한 경비정은 오픈탑 형식이었고 대부분의 북한 수병들이 근접전을 위해 함상으로 나와있었던 지라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이어서 포항급 초계함 영주함이 76㎜ 함포로 집중포화를 가했고 그 결과 북한의 신흥급 어뢰정 1척과 청진급 중형 경비정 1척 등 2척이 침몰하였으며, 다른 경비정 3척도 크게 파손된 채 퇴각하였다.

    제1연평해전 그 이후

    해전 직후 1시간이 채 안 되어 판문점에서 열린 유엔군 사령부와 북한군 사이의 장성급 회담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었는데, 이 회담에서 북한 측은 한국 측이 먼저 도발을 해왔다는 억지 주장을 펴는가 하면, 더 나아가 NLL이 국제법상 북한에서 12해리 이내이기 때문에 함정이 출동한 지역은 북한 영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먼저 기습적으로 포를 쏘기 시작하고도 교전에서 일방적으로 패배한 북한의 주장은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회담은 양측의 입장 차이만 드러낸 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연평해전 소식은 사람들에게 깜짝 놀랄 뉴스이긴 했지만 큰 이슈는 되지 못했는데, 당시 남북관계가 화해 분위기로 접어들고 있는 국면이기도 했고, 또한 우리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가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을 적게 끄는 요인이 되었다.

     

    북한의 경우 제1연평해전에서 당한 참패를 계기로 군수뇌부를 대거 교체하고 한국 해군의 전술교리를 연구하는 등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김정일은 제1연평해전 당시 참전하여 684호의 정장을 포함한 상당수의 승조원이 사망한 상황에서 배를 귀항시킨 갑판장 김영식 상위를 대위 계급으로 진급시킨 후 함장으로 임명하였고, 제1연평해전 당시 출항하여 평소 장착 중이던 함수의 85mm 전차포와 함교 뒷편 포좌에 장착된 4연장 고사총과 후갑판 및 주갑판에 있는 V-11-M 쌍열기관포마저 심각하게 대파되어 전포(全砲)가 사용불능이 된 채 퇴각한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를 개조하라는 지시를 내려 우선 함수의 포대를 견고히 개조하여 T-34-85 전차의 포탑에서 ZiS-S-53 85mm 전차포를 적출해내 해군 함상용 주포 포곽 안에 부착하여 선수에 재(再)탑재하게 된다. 또한 조선인민군 해군 서해함대 제29해상저격여단 소속 78식 저격보총 담당 저격수와 88식 보총 담당 보총수, 73식 대대기관총 사수 및 부사수와 31식 60mm 박격포 사수와 탄약수들을 증원해 태우고 충돌전을 대비에 선수에 레일을 용접시키고, 순항속도 타협과 동시에 방호력 증가를 위해 경도가 약한 철갑으로 주요부위를 보강하여 그 준비가 끝난 후에야 배를 출항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여기에 제1연평해전에서 우리 군 PCC들의 76mm 함포가 발군의 전과를 낸 점에 주목해 제2연평해전에서는 실크웜 대함미사일과 해안포대를 가동하여 PCC가 전투해역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주도면밀함을 보였다.

     

    당시 2함대 사령관 박정성 제독은 알 수 없는 이유로 6개월간 대기 발령을 받았다. 한나라당 의원의 문제제기로 군수참모부장으로 보직 발령 받고, 정보작전 참모부장을 거쳐 해군 군수사령관을 끝으로 2004년 소장으로 전역한다. 이에 박정성 제독은 데일리안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햇볕정책을 펴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껄끄러운 존재였고, 북한이 남측 전투 책임자를 좌천시키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본인이 좌천당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작 당시 승리의 주역이기도한 제2전투전단장 송영무 제독은 당시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이후 1함대사령관, 조함단장,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 등의 요직을 거쳐서 참여정부 시절 해군참모총장까지 역임한 뒤, 문재인정부에서 국방부장관에 임명된다. 이는 단순히 북한의 요구로 좌천되었다는 박정성 제독의 주장으로는 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으로 좌천된 게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제1연평해전에서 참수리정 325호에서 부상을 입으면서까지 투혼을 발휘하여 일약 해군의 영웅이 되었던 안지영 대위는 이후 제2연평해전을 교훈삼아 만들어진 신형 고속함 윤영하함의 초대 함장이 되었으며, 참수리 357호 정장이었던 연제영 대위는 대청해전에도 고속정 편대장으로 출격하였다. 연평해전에 대한 해군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