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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건사고/우리나라 해결된 사건 사고

북한의 도발 “연평도 포격전”

by hwani’s 2022. 12. 12.

목차

    북한의 도발 “연평도 포격전”

    목차
    1. 사건 개요
    2. 사건 경과
    3. 사건 발생
    4. 포격과 반격
    5. 결과

    사건 개요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부터 한반도의 서해 5도 중 하나인 대한민국령 연평도를 북한군이 선전포고 없이 포격한 사건. 또한 정전 협정 이래 최초로 발생한 민간 거주구역에 대한 공격.

     

    그전의 도발과는 달리 민간인 거주지역이 포격을 당했고, 군인은 물론 민간인 사망자까지 나온 상황이었기에 조금만 수습이 늦었어도 정말로 휴전이 깨질 수도 있었던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사건 경과

    북한군은 2010년 11월 23일 오전부터 호국 훈련을 실시한 대한민국 국군에게 실질적인 침략행위라고 항의를 하였고 대한민국 국군은 기존의 훈련이라고 통지문을 보냈다. 게다가 이후 기사에 따르면 호국 훈련보다는 그냥 일상적인 사격훈련이었다고 한다.

    사실 단순히 북한이 대한민국과의 관계만을 테이블에 놓는다면 명분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북한이 중국의 지원을 받아낼 수 있는지 여부였다. 첫째, 당시 중국은 아시안게임을 진행중이었고 주권지역 인근에서 문제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조중동맹조약에 따라 중국은 어디까지나 북한이 선제 공격을 당한 상황에서 발발하는 전쟁에만 개입하도록 되어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이라는 명분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

     

    그러나 사건이 발생했던 시점은 물론이고 사건 10년 후인 2020년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선제 공격의 주체로 북한을 명백하게 지목하지 않고 있다. 2010년 11월 25일 자 외교부 정례기자회견을 보면 훙 레이 당시 대변인은 선제공격 주체에 대해 답변을 회피하고 대화를 통한 재발방지만 촉구하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기조는 이후에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2012년 한겨레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포격 3시간 전 정보본부가 수시첩보보고를 발행하여 사전에 포사격 징후를 포착해 청와대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 등 20여 개 기관에 통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정부와 군 지휘부가 이를 묵살했으며, 연평도 사건 직후 열린 국정감사에서 사전 보고의 존재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사건 발생

    11월 23일 오후 2시경, 연평도에서는 하늘에서 무언가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으며, 굉음과 함께 연기가 올라왔다. 당시 하교하던 연평초등학교 학생들은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되었다. 그때는 연평어린이집의 원생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군인의 안내를 받아 대피소 안으로 피신했고, 이후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있는 대피소에 모여서 컵라면을 먹고 그곳에서 잠을 잤다.

     

    연평도에서는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텔레비전이 나오기 시작했고, 전화가 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연평도 주민들은 처음에 포탄이 떨어졌을 때 사격 훈련 중에 잘못 쏜거라고 생각했다는 당시 주민들의 증언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포탄이 날아오자 이상하다고 느껴 바로 대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포격과 반격

     

    폭발이 적의 포격임을 파악하자 포병들은 자주포들을 일단 포상 내부로 숨기고 나머지 해병들도 대피호로 대피하였으며, 14시 41분경 적의 포 공격이 멈추어 잠잠해지자 K-9 자주곡사포 3문을 포상 밖으로 다시 끌어내어 14시 47분경부터 대응사격을 시작했다.

     

    K-9 자주곡사포의 뒤에 보이는 화염에 대해 일각에서 열압력탄이라고 주장하였으나 화염은 대구경 열압력포탄에 의한 화염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작으며, 위로 피어오르는 형태의 화염을 내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당일 오전에 미리 예정된 호국 훈련 계획에 따라 정상적으로 훈련을 실시했다. 대한민국 해병대 연평부대도 호국훈련의 일환으로 남쪽 바다를 향하여 사격훈련을 했으나 북한은 이를 남한 측 도발로 규정하고 오후 14시 34분 대연평도에 기습적으로 포탄을 발사했고 남한 역시 14시 47분부터 이에 대응하였다. 북한군의 초반 포격에 한국군은 2대의 K-9 자주곡사포가 손상되었고 한국군은 남은 3대의 K-9 자주곡사포로 북한 황해남도 강령군 무도의 북한군 기지를 향해 50발의 보복 사격을 가했다. 30발쯤 사격할 때 1대를 긴급수리해 4대를 투입. 이후 북한이 다시 레이더 기지를 노리고 개머리 반도에서 포격을 개시하자 한국군은 다시 30여 발의 포를 개머리 반도에 발사했다. 교전이 중지될 때까지 북한군은 총 170여 발의 포를, 한국군은 80여 발의 대포병 사격을 실시했다. 합동참모의장의 발표에 따르면 오후 3시 41분 일단 포격은 종료되었다.

     

    북한군의 포탄 중 절반 정도는 바다에 떨어졌고 나머지가 연평도에 떨어졌다. 사용탄은 130mm과 75mm 포와 방사포탄을 사용했으며 또한 포격에 사용된 122mm 방사포바로켓 불발탄들이 연평도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연평도 지상에 떨어진 것들 중에 불발탄이 아니라 제대로 폭발한 포탄들도, 적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아군 포대쪽이나 군 시설에 정확히 떨어진 건 별로 없고, 대부분이 엉뚱한 민간인 지역 여기저기에 마구잡이식으로 산만하게 떨어졌다. 즉 북한군의 포 사격 수준이 매우 형편없었다는 것.

     

    한편 포격이 일어나고 있을 때 한국군이 14시 38분, 급히 KF-16,F-15K와 해군 함정들을 보내자 북한은 MiG-23 3대를 출격시키고 경비정도 출동시켜 공중과 해상에서도 무력충돌 직전까지 갔다. 이를 볼 때 북한은 확전이 될 것도 각오하고 이번 도발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포병사격 최초대응사격이 13분 이상 걸려, 평소 군 당국이 공언하던 5분 이내 대응사격에 비해 지연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으나 K-9 자주곡사포 6문 전체가 사격훈련 중 사태가 발생하여 지연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대응사격 역시 상당히 늦게 이뤄졌으나, 정밀한 타격을 위해 사격원점을 찾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군은 해명하였다.

    결과

    1시간가량(14시 34분~15시 41분) 북한군이 발사한 포탄들로 인해 군 막사가 파괴되고 인근 숲 등 10곳이 불에 탔고, 떨어지는 포탄들 중 몇 개가 주민들이 사는 가구 위로 떨어져 민간인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상가 건물이 붕괴되었다. 또 해당 지역 소방서에는 차량이 1대뿐이며 전담 소방요원도 2명밖에 없는 데다가 전기도 끊어진 상황이라 진화 작업이 힘든 탓에 마을이 전소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다급히 24일에 소방차 24대가 긴급 투입되면서 포격으로 10여 곳에 발생한 산불과 가옥과 창고 등을 태운 주택가 화재까지 모두 진화되었다.

     

    대치 중이던 F-15K와 MiG-23은 결국 MiG-23이 도주하면서 대한민국 공군 측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1,700여 명의 주민들이 대피를 완료했다. 포격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 오후 2시 20분에 인천항에서 온 여객선이 도착한 뒤에, 포격이 시작되자 미처 내리지 않은 원래의 승객과 부두로 도망쳐 온 주민 일부를 태우고 인천항으로 회항하기도 했다. 발발 직후 연평도로 향하는 모든 항로는 폐쇄되었고, 23일 오후 11시 일부 주민들은 자기들의 어선으로 인천 본토로 대피하였으며, 나머지 주민들은 방공호에 대피했다.

     

    다음 날인 24일부터는 본격적인 피난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해양경찰청의 지원 하에 어린이, 노약자, 환자를 우선하여 346명의 주민들이 해경 경비함 두 척에 나눠 타고 오전 7시에 연평도를 출항, 오후 2시경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후 해경 공기부양정과 해군 공기부양정(러시아제 무레나급)이 167명을 추가로 더 태우고 오후 3시에 인천항에 도착했고, 오후 7시에는 다시 추가로 17명을 태운 해경 경비정이 인천항에 도착했다.

     

    25일에는 운항이 재개된 여객선과 해경 경비정을 이용하여 추가로 172명이 인천 본토로 피난했다. 25일까지 연평도 전체 주민의 80%에 달하는 1,115명이 인천으로 대피했고, 남아 있는 민간인은 약 280명 선이다.

     

    처음에는 민간인 사망자는 없는 걸로 파악되었으나, 11월 24일 오후에 민간인 2명의 시신이 새로 발견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25일 오후 4시 10분 인천 본토에 도착했다.

     

    2010년 11월 26일 오후부터 어민들의 조업이 재개되었다. 쳐놓은 그물들을 놔둘 수는 없다고 해서 허가를 내렸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목숨 같은 그물을 건지러 가는 어민들의 심정이 충분히 예상된다.

     

    이 사태로 연평도 주민들이 일정 기간 연평도를 비운 사이에 몇몇 절도범들의 절도행위가 발생하여 경찰에 도난신고가 접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