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전설의 투수 해태타이거즈 선동열
목차
1. 선수 소개
2. 해태타이거즈
3. 주니치 드래곤즈
4. 은퇴
5. 선동열 기록
선수 소개
1963년 1월 10일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읍 도산리 원도산마을에서 태어난 선동렬 선수는, 키 184cm와 몸무게 97kg의 훌륭한 체격을 가진 야구선수였습니다. 그는 송정동초등학교, 무등중학교, 광주일고를 거쳐 고려대를 졸업하였으며, 주 포지션은 투수였습니다. 그의 별명으로는 SUN, 무등산 폭격기, 아시아의 태양, 광주의 태양 등이 있습니다.
1985년에 해태타이거즈에서 프로입단한 선동렬은 이후에 10년간 같은 팀에서 활약하였으며, 이후에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선동렬은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을 졸라서 결국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관 사업가로서 아들을 보고 싶어하는 아버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야구를 고집하여 학창 시절 유격수에서 투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1980년 대통령배 전국대회에서 에이스 겸 5번 타자로 활약한 그는 결승전에서 구원 등판하여 우승을 이끌어내었습니다. 같은 해 봉황대기 경기에서 경기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 기록으로 실력을 입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연세대와 한양대가 입학시키려 하던 중 아버지가 직접 전화를 걸어 고려대에 진학시켰다고 합니다. 정삼흠, 한영준 등의 동기와 함께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에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이끌어냈습니다. 1984년에 LA 다저스에서 오퍼를 받았다고 밝혔으며, 본인도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해태로 입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한국화장품 야구단과의 갈등이 발생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선동렬은 1985년 해태 타이거즈와 계약하여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학 졸업 후 실업야구에 진출한 선수는 실업야구에서 최소 2년 동안 활동해야 프로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해태타이거즈
데뷔전에서 삼성 라이온즈와의 첫 프로 경기에서 7회까지 4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를 펼친 선동열은, 결국 8회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어 7.2이닝 동안 5실점을 기록하며 그 경기를 마쳤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경기 후 "좋은 경험을 얻었습니다. 저의 프로생활을 위해 패전투수가 된 것이 오히려 좋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의 전성기는 실제로 완벽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구속은 최고구속 150km대에 달할 정도로 매우 빠르며, 체격, 배짱, 제구력, 센스 등 모든 투수 자질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미국 MLB에서 관심을 가졌던 한국 야구선수 중 선동열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평균자책점 1위(1.70)를 기록하며 첫 시즌을 화려하게 마무리했습니다.
1988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김응룡 감독이 선동열을 불펜에서 몸 풀게 하여 상대 타자들의 심리적 압박감을 유발하는 전략적인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선동열은 부상 이후 전업 마무리 투수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해태 타이거즈를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부상과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시즌 아웃되면서 커리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동열은 KBO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통산 평균자책점과 완벽한 제구력 등 다양한 요소들로 인해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억대 연봉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서도 기억되며, 자신의 경기력과 의지로 해태 타이거즈를 여러 차례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주니치 드래곤즈
선동열은 해태 타이거즈를 떠나 주니치 드래곤즈와 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당시 KBO에는 FA제도가 없어서, 선수가 아무리 팀에 기여를 많이 해도 구단에서 그를 방출하지 않으면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없었습니다. 1995년 시즌 후, 11년간 6회의 우승에 크게 기여한 선동열은 해태 구단에 해외 진출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해태 구단은 결국, "1년만 더 뛰고 1996년 우승한 후 떠나라"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선동열은 은퇴불사 전략을 사용하여 강경하게 대응하였고, 대다수의 국민들도 그의 해외 진출을 지지하여 결국 일본 프로야구 팀인 주니치 드래곤즈로 임대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적료 3억 엔으로 주니치와 임대 계약을 체결하고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첫 시즌인 1996년에는 국내 프로야구보다 좁은 스트라이크 존과 상대적으로 고품질의 일본 타자들과의 대결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한국 타자들이 헛스윙하기 급급하던 공을 일본 타자들은 가볍게 안타로 만들어 내면서 속수무책 상태였습니다.
당시 요미우리의 외국인 타자였던 셰인 맥이 선동렬의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홈런을 친 적이 있습니다. 경기 후 "슬라이더밖에 없네, 슬라이더만 쳐라"는 발언까지 남겼다고 합니다. 사실상 일본 진출 첫해 FIP는 2점대였으므로, 성적만 보면 운도 따르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996년 시즌이 끝나고 겨울이 되자 선동열은 마음을 다잡고 투수 코치에게 개인 훈련을 부탁하여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갔습니다. 3000개의 투구와 하체 단련으로 제구력을 다듬고, 투구 폼을 수정하여 주자 견제 능력을 보완하는 등의 노력으로 1999년 시즌까지 좋은 활약을 보였습니다.
선동열이 정말로 대단한 점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자존심을 내려놓고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KBO에서는 상대팀 타선을 초토화시키며 절대자로 군림하던 그가 일본에서는 구위는 괜찮으나 제구와 경기 운영능력 부족으로 인해 2군에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결심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변화는 결국 1997년과 1998년 시즌에 최고 수준의 마무리 투수로 등극하게 되면서 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선동열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좋은 모습을 보인 선수들 중 한 명입니다. 이러한 사례를 볼 때, 한국 야구가 탑 클래스 선수들의 해외 진출 준비를 위한 발판 역할로 전락하는 것에 큰 영향을 준 것이 바로 선동열의 이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은퇴
선동열의 은퇴는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풍성한 역사를 남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은퇴를 명예롭게 여겼지만, 실제로는 주니치와의 협상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문제들 때문에 완전히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1999년 시즌 중반부터 그의 구위가 점점 떨어져가며, 선동열은 2군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주니치 감독인 호시노 센이치는 선동열과 사사키 가즈히로 모두 구위보다 얼굴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고 발언하면서 그들의 상태에 대해 우려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니치 구단은 새로운 마무리 투수 에디 게일러드를 영입하였고, 선동열에게 다음 시즌에는 미들맨으로 활약하거나 필요에 따라 2군으로 내려갈 준비도 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 선동열은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하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1999년 말, 주니치가 중앙 리그 우승을 기념하여 미국으로 여행을 갔을 때, 그는 보스턴 스카우트와 만나 입단 등을 논의하였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조건들과 부친의 돌아가신 일 등이 겹쳐 결국 1999년 11월 22일 은퇴를 결정합니다.
선동열은 KBO에서 일본까지 활약하며 수많은 팬들에게 기억될 만큼 크게 인상적인 경력을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장애물과 도전 앞에서 깔끔하게 은퇴하는 결심력이 있었다는 것 역시 인상 깊었습니다.
그의 은퇴식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팀 대표 타자였던 마쓰이 히데키와의 대결은 많은 이들에게 기억될 만한 순간이었습니다. 마쓰이는 선동열을 상대로 안타를 치며, 그 경기가 끝난 후에는 "현역을 은퇴하는 선수에 대한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예의다. 오히려 일부러 치지 않았으면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선동열의 은퇴식은 그 자체로도 한 편의 드라마처럼 진행되었습니다.
선동열 기록
선동열은 투수의 트리플 크라운을 3회 달성하였습니다. 이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방어율, 다승, 삼진, 승률 모두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1986년에는 다승, 방어율, 삼진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였으나 승률 부문에서는 2위로 트리플 크라운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삼진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트리플 크라운을 총 4회 달성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KBO 역사상 선동열 외에 류현진과 윤석민만이 한 번씩 투수의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습니다.
1986년 선동열이 승률 부문에서 2위를 차지한 이유는 마지막 경기에서 최일언이 패전을 면해 승률 타이틀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경기에서 김형석은 최동원 상대로 중요한 3루타를 친 덕분에 최일언은 패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트리플 크라운 기준은 탈삼진 부문 대신 승률 부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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