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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특급 투수 박찬호 선수에 대해 알아봅시다.

hwani’s 2020.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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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특급 투수 박찬호 선수에 대해 알아봅시다.

목차
1. 프로필
2. 아마추어 시절
3. LA다저스
4. 텍사스 레인저스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5. 두번째 LA다저스
6. 뉴욕양키스
7. 피츠버그 파이리츠
8. 오릭스 버팔로즈
9. 국가대표
10. 박찬호의 기록들

 

프로필

박찬호 (朴贊浩 / Park Chan-ho)
출생 : 1973년 7월 28일 (46세) / 충청남도 공주시
국적 : 대한민국
본관 : 충주 박씨
학력 : 공주중동초등학교 / 공주중학교 / 공주고등학교 /한양대학교 경영학과 (명예졸업)
배우자 : 아내 박리혜 (2005년-현재)
자녀 :
딸 박세린 (2006년생)
딸 박애린 (2008년생)
딸 박혜린 (2014년생)
종교 : 불교
신체 : 184.5cm, 95kg, A형
포지션 : 투수
투타 : 우투우타
프로입단 : 1994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LAD)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94~2001)
텍사스 레인저스 (2002~2005)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2005~2006)
뉴욕 메츠 (2007)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8)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9)
뉴욕 양키스 (2010)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0)
오릭스 버팔로즈 (2011)
한화 이글스 (2012)
별명 : 코리안특급, 투머치토커(Too Much Talker)
병역 : 예술체육요원

아마추어 시절

박찬호는 공주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1년에 청소년 대표로 한미일 청소년 야구대회에 참가하여 미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MLB의 꿈을 키웠습니다. 공주고에서 그는 4번 타자로 활약했지만, 당시 주목받던 유망주들인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등과 비교하면 그의 이름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시기 팀 동료로 손혁과 홍원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고향 팀인 빙그레 이글스와 계약금 5천만 원으로 거의 합의 상태였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인해 한양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한양대 2학년 때인 1993년에 버펄로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 활약한 박찬호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뉴욕 양키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 여러 구단으로부터 오퍼를 받게 되었습니다. 초기 접촉은 애틀랜타와 이루어졌고, 애틀랜타 쪽에서 계약금 30만 달러를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지 사정에 익숙하지 않던 박찬호는 스티브 김(나중에 박찬호의 에이전트가 됨)을 통해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받음을 확인하였고 결국 다저스와 계약금 120만 달러 오퍼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후 복잡한 병역 문제 등으로 인해 계약 진행이 부드럽지 않았으나 결국 성사되어서 박찬호는 로스 앤젤레스 다저스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LA다저스

다저스에서 그가 처음 원하는 등번호는 '16'이었습니다. 이는 공주고와 한양대 시절에 사용하던 번호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다저스의 16번은 투수 코치인 론 페로나스키가 사용하고 있어서 박찬호는 아마추어 시절의 등번호를 뒤집어 '61'번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MLB 데뷔전은 1994년 4월 9일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전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등판을 하였으나 코칭 스태프의 판단으로 결국 마이너리그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약 2년간 마이너리그에서 경험을 쌓았습니다.

1996년부터 박찬호는 메이저리그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간계투자로 출발하여 점차 선발 투수로 자리잡아갔습니다.

1997년에는 14승, 1998년에는 15승을 거두며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부상과 여러 사건들로 인해 성적이 점차 하락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텍사스 레인저스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박찬호는 1997년부터 풀타임 선발로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으며, 2001년에도 이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2001년 시즌을 부상과 함께 마무리하며 FA로 대박을 찍겠다는 계획이 실패하였습니다. 시즌이 끝난 후에 다른 팀들은 박찬호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입 제안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애틀 매리너스만이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이스급 투수가 필요했던 텍사스 레인저스는 박찬호의 상황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2001년 말, 박찬호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총 6500만 달러가 보장된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만약 실제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상이 있었다면 입단 전 메디컬 검사에서 걸려났을 것입니다. 따라서 텍사스 입장에서는 일단 계약금으로 유망한 피칭 스태프들의 관심을 사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박찬호의 이적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알링턴 볼파크라는 타자 친화 구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첫해부터 평균자책점 5.75를 기록하는 등 성적 하락세를 보여주었습니다. FA 계약 첫 해라서 구장 적응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해보면 좋은 성적을 낼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만, 결국 그 기대와 달리 부상과 함께 나빠진 성적으로 인해 최악의 FA 계약 중 하나로 꼽혔습니다.

그 후 몇몇 시즌 동안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 박찬호는 거의 모든 시간을 부상으로 인해 잃어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언론에서는 박찬호를 비난하는 원색적인 보도가 이어졌고, 이 때문에 박찬호는 언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반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이적한 후에는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방어율은 좋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시즌 10승을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원인 불명의 장출혈로 인해 고생하였고, 그 때문에 로테이션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결국 박찬호는 텍사스 시절 기대했던 에이스로서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결과 텍사스의 선발진은 몇 년간 약화되었으며, B급 선수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샌디에이고에서의 박찬호는 자신의 건강 문제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료들과 코치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였습니다.

두번째 LA다저스

2008년 박찬호는 올림픽 예선에서 호투를 펼친 후 LA 다저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그는 상당한 구위 회복을 보였고, 중간계투로 주로 활약하면서도 선발투수로 등판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해 5월 17일에 열린 LAA와의 인터리그에서 박찬호는 7년 만에 다저스 소속으로 선발등판하여 4이닝 2실점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경기는 MLB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시아인 투수들만이 한 게임을 모두 던진 경우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이날 다저스의 선발은 박찬호가, 중간 계투는 궈홍치가, 마무리는 사이토 다카시가 맡아 아시아인 투수들만으로 한 게임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6월 21일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등판한 박찬호는 MLB 전 구단 상대 등판기록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케빈 브라운, 알 리터, 재비어 바스케즈, 제이미 모이어와 함께 기록에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 박찬호의 복귀가 완전한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습니다.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클레이튼 커쇼의 부상과 커쇼가 받은 대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였다고 보여집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박찬호는 2008년 시즌 동안 대부분 중간 계투로 활동하며 일정 수준의 성적을 유지하였습니다. 비록 그가 원하던 선발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전년도 거의 모든 시즌을 마이너 리그에서 보낸 것과 비교해본다면 메이저 리그 복귀는 큰 성공이었습니다.

다저스는 이 해 내셔널리그 서부지구를 4년 만에 재탈환하고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진출하는 등 팀 성적도 준수했습니다. 하지만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밀려 결국 탈락하였습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

2009년, 박찬호는 LA 다저스를 떠나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계약은 최소 250만 달러에서 최대 500만 달러의 가치가 있었으며, 그에게 5선발 후보로서 경쟁할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는 시즌 초반에 선발로 나섰지만, 1승을 거둔 후 중간계투 요원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필리스 감독인 찰리 매뉴얼은 박찬호를 계속해서 신뢰하고 등판시켜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팬들 사이에서 매뉴얼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박찬호는 중간계투로 전환한 후 구위가 상승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주목 받았습니다.

박찬호의 선발 부진의 원인에 대해 일부에서는 부상설을 제기하였지만, 박찬호 본인이 과도한 기대감과 부담감 때문에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자신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릴리프 투수로 전환된 후 좋은 피칭을 보여주며 안정감을 되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 시즌 동안 그는 "The Pen"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주 보여진 모습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MLB 네트워크에서 방송되었으며 필라델피아 불펜 선수들의 일상을 다루었습니다.

그 해 박찬호는 '불펜 에이스'라는 칭호를 얻으며 롱릴리버로서 황금 스탯(삼진/볼넷 비율 10 이상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른쪽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시즌 마지막부분에 장기간 결장하는 아쉽운 상황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상을 이겨내고 필리스의 내셔널리그 우승에 기여하였습니다. 그는 LA 다저스를 상대로 한 NLCS 1차전에서 결정적인 위기 상황을 모면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월드시리즈에서도 박찬호는 4게임에 등판하여 3⅓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팀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필라델피아 필리스는 최종적으로 우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호는 예년과 달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팀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NL 우승이 확정된 후 관중석에 올라가 샴페인을 터트리는 장면

뉴욕양키스

2010년, 박찬호는 뉴욕 양키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때 그의 선택은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향한 그의 열망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카고 컵스가 제안한 300만 달러의 계약과 5선발 자리에 비해 양키스와의 계약은 1년에 기본 120만 달러 + 보너스 30만 달러로 불펜 투수로서 활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등번호는 다시 한번 61번을 선택하였습니다. 외야수 그렉 골슨이 자신의 등번호였던 61번을 포기하고, 박찬호는 다시 한 번 자신이 매번 달아오던 번호인 61번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박찬호는 시즌 초반부터 부진함을 겪었습니다. 특히, 레드삭스와의 경기에서 좌월 홈런과 폭투를 범하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어 패전 투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양키스가 에인젤스와 경기에서 연장전에 들어간 상황에서 박찬호는 교체 투수로 등판하여 성공적으로 이닝들을 소화하며 승리를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이 고비를 넘긴 후에도 박찬호는 오른쪽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장기간 결장하게 됩니다. 복귀를 위해 잠시 스프링 캠프에서 재활에 집중하기도 하였으나,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결국 장기간 결장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

2010년, 박찬호는 뉴욕 양키스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상과 부진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아시아 투수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는 등의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박찬호는 2010년 시즌이 끝난 후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팬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가 한국에서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비판을 받는 것보다는 메이저리그에서 깔끔하게 은퇴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호 자신은 아직 메이저리그에서 도전할 여력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2011년에도 계속해서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10년 12월,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즈와의 계약 소식이 알려지면서 상황은 변화합니다. 원래 한화 이글스로 돌아가길 원했던 박찬호였지만 다양한 규정상의 문제 때문에 결국 일본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원하던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얻지 못한 채로 메이저리그 생활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활약은 많은 팬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오 릭스 버팔로즈

2011년, 박찬호는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시즌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적은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시범경기에서부터 불안한 모습을 보였고, 이어지는 정규시즌에서도 여러 차례 부진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호는 여러 번의 좋은 경기를 펼쳤습니다. 4월 22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전에서 7이닝 동안 3피안타를 허용하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일관된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감독의 신뢰를 잃게 되었고, 결국은 2군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이후 복귀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결국 팀의 승리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박찬호의 일본 리그 생활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한화 이글스로 돌아오길 원하는 그의 바람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릭스 버팔로즈와 함께한 시즌 역시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박찬호가 한국에 복귀하지 않고 일본 리그에서 활동하면서 팬들 사이에선 "까짓거 뭐..."라는 반응도 나왔습니다. 그 후 오릭스 버팔로즈는 박찬호와 계약을 해지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국가대표

박찬호는 한국 야구의 전설적인 인물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후에도 국가대표 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는 류현진과 함께 한국 야구의 원투펀치 에이스로서 국가대표 팀의 성공을 이끌었습니다.

박찬호는 국제 대회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그의 체인지업은 다른 나라 타자들에게 큰 위협이었으며, 그 결과 많은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 시기에 박찬호의 투구 위력이 약화되었다고 여겨졌지만, 실제 경기에서는 아주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07년에는 메츠에서 부진하여 은퇴를 고려하던 중 베이징 올림픽 예선에 참가하였고, 대만 타선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등 승리를 이끌어낸 주요 인물로 활약하였습니다.

 

박찬호의 국제대회 성적은 다음과 같다.

  •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야구
  • 예선전 vs. 대만 : 5이닝 1실점 승리
  • 예선전 vs. 대만 : 1⅔이닝 0실점
  • 결승전 vs. 일본 : 7이닝 1실점 승리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1라운드 vs. 대만 : 3이닝 0실점 세이브
  • 1라운드 vs. 일본 : 1이닝 0실점 세이브
  • 2라운드 vs. 멕시코 : 1이닝 0실점 세이브
  • 2라운드 vs. 일본 : 5이닝 0실점
  •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 예선전 vs. 대만 : 3이닝 무실점

박찬호의 기록들

  • 1994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입단. 그 해에 NL에서 두번째로 어린 선수였음 (만 21세)
  • 1997년~2001년 5년 연속으로 13승 이상 기록
  •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야구 대표팀(드림팀 I) 소속으로 금메달 (병역특례)
  • 2000년 18승 10패, 평균자책점 3.27, 226이닝 기록, 다승 NL 5위
  • 2000년 피안타율 6.89개 - NL 1위 (다만 피출루율은 NL 10위권 밖)
  • 2000년 삼진 217개 - NL 2위
  • 2000~2001시즌에 걸쳐 34이닝 연속 무실점 피칭.
  • 2001년 35경기 선발 출전 - NL 1위 (15승 11패, 평균자책점 3.50, 234이닝)
  • 2001년 올스타전 출전
  • 2001년 삼진 218개 - NL 3위
  • 통산 국제대회 성적 2승 3세이브 26⅔이닝 2실점 2자책점 평균자책점 0.68[83]
  • 2009년 월드 시리즈에 4경기 3⅓이닝 등판해서 평균자책점 0 기록
  • 통산 홈런 총 3회 기록
  • 2010년 9월 13일까지 메이저리그 통산 123승 97패, 노모와 더불어 아시아 최다승 타이기록.
  • 2010년 10월 2일 124승 98패로 아시아 최다승 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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