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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건사고/우리나라 해결된 사건 사고

12.12 군사 반란(반정부 군사 쿠데타)

by hwani’s 2022. 7. 5.

목차

    12.12 군사 반란(반정부 군사 쿠데타)

    목차
    1. 사건 개요
         1-1. 군사 반란 원인
    2. 사건 전개
         2-1. 계엄사령관 체포 계획
         2-2. 작전 개시
         2-3. 작전 성공

    사건 개요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 육군 내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의 멤버 전두환이 주도하여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제5공화국의 실질적인 시작이 되는 사건.

    사건이 발생한 이래로 문민정부 시기까진 주로 12.12 사태 내지 12.12 사건으로 불렸으나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을 거치며 반정부 군사 쿠데타(내란)로 재정의되어 공식적으로 12.12 군사반란이라 불리게 됨.

     

    군사 반란 원인

    10.26 사태 이후 새벽 4시 김재규가 체포된 후 국방부 회의실에서 각료들은 서둘러 비상조치를 내렸다. 신현확은 대통령이 서거했고 그 범인은 김재규였다는 것을 알리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 국가 원수직이 비어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에 의하면 대통령 유고 시 국무총리가 승계하도록 돼 있으니, 지금부터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 이 제안을 받아들여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로 인한 계엄의 선포로 인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통령 권한대행과 함께 정국을 이끌게 되었는데 최규하는 이때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최규하는 권한 대행 수락 당시 "지금 이 순간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겠다."고 전국계엄이 아닌 부분계엄을 선언했기 때문. 이 조치는 사실상 최규하 스스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군 통제권을 포기한다는 뜻. 왜냐하면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 총 책임은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일부에 한해 계엄령이 내려지면 국방부 장관이 총 책임을 맡게 되기 때문. 원래 최규하는 정치에 휘말리기를 싫어했기에 정치적 부담감이 크다고 판단하여 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해버렸다. 이 때문에 계엄령 이후 '계엄사령부'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이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 거기에 국방부 장관이였던 노재현은 그릇이 부족한 사람이었고, 전두환과 각별했던 사이였기에 훗날 정승화와 전두환이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도 전두환을 두둔하기에 바빴던 인물.

     

    그 와중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철저한 원칙론자로, 정치에 휘말리기 싫어서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스스로 막았다. 실제로 권한대행 당시에 정승화가 계엄사의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자, 지금은 전국계엄이 아니라 부분 계엄이니 자신한테 보고하지 말고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라 할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 이로 인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10.26 사태 수사를 총괄하게 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됬고 계엄사령관 정승화 입장에서 전두환은 곧 숙청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미 전두환을 위시한 군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는 전두환의 동기생들인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을 주력으로 서로 상부상조하여 군부 내의 요직을 하나 둘 차지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기존에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기존 군부세력을 위협할 만한 수준으로군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권력집중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기존에 정보활동을 하던 대통령 경호실의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의 김재규가 동시에 무력화 되면서 사실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정보기관이 보안사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정보력이 국군보안사령부로 집중된 것도 전두환의 세력이 강화된 주 원인으로 작용. 더욱이 전두환은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으므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합법적으로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와 검찰, 경찰 등 모든 정보·수사 기관들을 지휘 및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집중된 정보력을 이용해 전두환은 정치인들의 이러저러한 비리를 캐내어 이용하거나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10.26 사건의 수사 내용을 임의로 편집하여 보고하는 등,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도하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망각한 채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정치에 관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전두환은 김계원을 조사하던 중 김계원의 집에서 약 9억 원 정도의 수표 뭉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 돈을 먼저 박근혜에게 6억 원, 노재현에게 5천만 원을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정승화에게 2억 원을 전달하려 했으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핀잔만 들었다. 정승화는 이런 전두환의 월권에 화가 나서 노재현에게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뇌물을 받은 노재현은 전두환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정승화는 노재현을 찾아가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계속 요구했고, 특히 사조직이 군의 기강을 다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인사 개편을 통해 하나회 장교들의 기세를 꺾어놓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 겸 합수부장 직에서 쫓아내기 위해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보직 이동 시킬 것을 계획하고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과 상의했고, 하나회의 인사들을 군 핵심부 요직으로부터 밀어내어 제거하려는 계획을 은밀히 세운다. 그리고 당시 강직하고 청렴한 참군인으로 평가받던 갑종출신인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 하나회 측의 불온한 움직임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조치들도 서두른다.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 보직이동에 관한 정승화 총장의 계획을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알렸고, 김용휴는 이를 전두환에게 전달. 보안사의 정보력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군부에 거대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던 하나회 측이 정승화의 계획을 매우 빨리 감지한 것. 요직이란 요직은 모두 하나회가 장악했고 더욱이 당시에는 누가 하나회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승화의 움직임은 이런 사조직의 인맥을 통해서 속속 전두환 측에 전해졌다.

    사건 전개

    계엄사령관 체포 계획

    전두환과 하나회는 정승화 총장보다 한 발 빨리 움직여서 정승화가 박정희 시해사건 현장에 있던 것을 구실로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 전두환은 10.26 사건 당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와 한 패였다고 주장하면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구실을 만들었고, 하나회 조직원들과 함께 모여서 1주일 만에 12월 12일에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의한다.

    작전 개시

    1979년 12월 12일 저녁,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하나회 소속의 주요 지휘관들은 각자 준비를 마친 후 경복궁 옆 구 일본 육군 헌병 주둔지에 위치한, 장세동 보병대령이 단장이던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집결. 일단,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이자 합동수사본부의 핵심 브레인이었던 허삼수 육군 보병대령은 합수부 수사관들 및 수경사 33헌병대와 함께 정승화 총장의 관저를 찾아가서 김재규에 동조했다는 혐의에 대한 진술 조사를 해야겠다는 명목으로 정 장군의 신병을 확보하여 강제로 서빙고로 끌고 오는 데 성공.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정승화 체포와 동시에 정승화 체포수사에 대한 대통령 재가를 받아서 합법화하려던 원래 계획이 대통령의 재가 거부로 인해 실패했다는 것.

    이 때문에 정승화 체포가 법적으로 위법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사령부 산하에 있었으므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는 전두환의 직속상관이 되기 때문에 군 지휘체계상 전두환이 함부로 체포를 할 수 없었기 때문.

    한편 합수부 수사관들과 함께 관저 안으로 들어간 허삼수는 정승화 총장에게 박정희 시해 사건과 관련된 의혹과 혐의에 대해 자세한 조사를 할 게 있다며 보안사 합수부로의 동행을 요구하자 정총장은 이를 거절. 그러자 허삼수는 임의동행을 거부한다면 수사를 위해 강제로라도 연행할 수 있는 재가를 대통령에게 이미 받았다고 주장하며 끌고 가려고 했으나 정승화 총장은 대통령의 연행 승인 재가가 있었는지를 먼저 확인해 봐야겠다며 전속부관인 이재천 육군 보병소령에게 전화로 확인해보라고 지시했고 이 소령이 청와대에 전화를 걸려고 하자 이를 제지하고 협박하기 위해 합수부 장교가 권총을 발사해서 이 소령은 총상을 입었다. 그러자 참모총장 경호장교인 김인선 육군 보병대위가 합수부 수사관들을 향해 권총을 뽑아들었고 그 순간 수사관 장교들이 총을 발사해서 김 대위 역시 총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33헌병대를 데리고 온 같은 편인 우경윤 헌병대령도 유탄으로 인한 총알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육군본부 측은 정승화 참모총장의 부인이 건 전화에 의해 처음으로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승화를 납치한 사람들이 누구인지조차 알 길이 없어서 처음에는 북한 공비들의 짓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곧 납치세력이 합동수사본부, 즉 보안사 소속임이 확인되고 여타 정황들이 종합되면서 전두환 측이 벌인 일임을 확인하였고, 전군에 비상을 걸고 대응에 들어갔다.

     

    수경사령부로 가면서 장태완은 참모장 김기택 준장을 통해 헌병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경장갑차 2대, 헌병특공대 1개소대, 부상자 구조를 위한 구급차 1대로 기동타격대를 꾸려 총장공관으로 급파하라는 작전지시를 내린다. 이후 사령부로 복귀한 뒤 참모장 김기택 준장으로부터 30경비단에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일당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30경비단장 장세동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대신 전화를 받은 선배인 황영시와 유학성이 "알 만한 친구가 왜 이렇게 흥분하는가? 30경비단으로 와서 우리랑 얘기해 보면 정승화 총장 체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장태완은 펄펄 뛰면서 "이 반란군 놈의 새끼들! 거기 꼼짝말고 있거라! 내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황영시-유학성 순으로 통화하는 것으로 묘사됐으나, 실제 통화에서는 유학성-황영시 순으로 이뤄졌다. 이에 30경비단에 모여 있던 일당들은 장태완이 공격해올 것을 걱정하며 대비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하나회를 통해 자신이 장악하고 있던 대통령경호실 소속 병력으로 최규하가 있던 국무총리 공관을 확보하였다.

     

    전두환 측은 장태완의 병력동원 시도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기정사실화하고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애초에 작전에 앞서 전두환은 1, 3, 5 공수여단장들에게 잇달아 지시를 내렸었다. 경복궁 30경비단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 여단장 가운데 3공수여단장 준장 최세창과 5공수여단장 준장 장기오는 비상령이 떨어진 후, 자신들의 부대를 장악하기 위해 부대로 돌아갔고 1공수여단장 박희도 준장은 한발 늦게 행주대교로 우회해서 귀대해 있었다. 30사단 관할이던 행주대교를 제외한 모든 한강 다리는 수경사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

     각 부대에 내려진 지시는 다음과 같다.

     

    1공수여단을 동원해 국방부와 육군본부 점령,

    3공수여단으로 3공수여단 영내에 있는 특전사령부 본부 건물을 습격하여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

    5공수여단은 효창운동장으로 출동, 대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하나회 소속 장교들을 이용해 수경사 헌병단을 장악, 수경사로 지휘부를 옮긴 진압군 측 주요 인사들을 제압하려 하였다.

    전두환 측은 공수여단 외에도 사단장 노태우가 이끄는 9사단 29연대와 30연대 소속 1개 대대 30사단의 90연대, 제2기갑여단의 1개 전차대대도 중앙청으로 출동하라고 지시.

    작전 성공

    결국 육군본부 수뇌부는 쌍방간에 상호 병력을 동원하지 말자는 전두환의 '신사협정' 제안을 수락. 이에 따라 반란군 진압의 실질적인 최고지휘관이었던 육군참모차장 중장 윤성민은 9공수여단장 준장 윤흥기에게 부대로 복귀할 것을 지시, 윤 준장은 이 명령에 따라 9공수여단 병력을 부천IC 부근에서 회군시킨다. 그리고 곧 진압군 측 수뇌부는 반란군 측의 신사협정 제안을 순진하게 믿고 수락해버린 어리석은 판단의 대가를 확실하게 치르게 된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1공수여단 병력에 의해 순식간에 점령. 진압군 측이 국방부 청사 옥상에서 20mm 발칸포를 발사하면서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대지용이 아닌 대공용으로 설치된 것을 눕혀서 발사한 것이기에 제대로 된 각도가 나오지 않아 반란군 측의 실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또한 소수의 방어병력으로 정예 병력의 기습공격을 견뎌내는 것은 애초에 한계가 있는 일. 그리고 도망다니던 국방장관 노재현은 하필이면 하나회 쪽 병력이 국방부를 치기 직전에 국방부로 털레털레 왔다가 바로 하나회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이때부턴 비굴하게 반란군에게 협조.

    당시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마지막으로 반란 수괴들을 체포할 작전을 준비한다. 김기택 참모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1. 전차를 선두로 수경사 내 가용가능한 모든 병력을 전투조로 구성한다.

    2. 목표는 경복궁과 보안사령부로 하며, 공격 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앞이다.

    3. 출발은 내가 선도하며, 중앙청 부근에 적절한 진지를 잡아 전차포, TOW 대전차포, 106mm무반동포, 3.5로켓포로 2개 목표를 동시에 타격후, 역모자들을 사살또는 포획하고 반란을 진압한다.

    이걸 듣고 놀란 윤성민 참모차장이 장태완 사령관을 말리며, 마지막으로 3군사령관에게 병력동원이 가능한지 물어 보겠다고 했지만 결국 26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은 출동이 불가하다는 답변만 돌아왔고,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병력들이 집결한 연병장으로 향하여, 준비태세를 체크하기 시작. 전차 대열에 다가가는 그때, 갑자기 비서실장 김수택 중령이 나타나 "사령관님, 제가지금 저 앞의 전차소대 쪽에 갔더니, 30경비단편에 있는 전차대대 본부에서 사령관님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빨리 이 자리를 피하셔서 사령부로 돌아가시는게 좋겠습니다. 저희의 최후 공격 주력이 저 전차 4대 뿐인데 저것들이 저러니 나머지 병력들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 다끝난것 같습니다. 사후정리를 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를 들은 장사령관은 결국 허탈해하며, 병력들을 해산시키고 사령부로 돌아온다.

    그리고 바로 장태완 자신의 부하들인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중령 신윤희에게 체포를 당하면서 수경사 또한 반란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만다.

     

    하나회는 반란 초기에 경호실 병력을 동원해 최규하를 구금하다시피 했고, 참모총장인 정승화는 반란군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당시 상황에서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동원해 반란 진압을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국방장관 노재현뿐이었다. 그 때문에 반란군도 반란을 진압하려던 장군들도 노재현의 행방을 찾고자 했고, 최대한 자의적으로 병력을 움직이려 한 장태완 사령관을 육군본부 측에서 말릴 때도 이유가 "국방부 장관이 있어야 된다."였다. 하지만 노재현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그냥 도망쳐 다닌 끝에, 정상적인 명령체계를 지키려던 이들이 정상적인 명령 체계를 무시한 반란군의 행동에 끌려다니다 반란군에게 제압당하는 상황이 일어나고 만 것.

    붙잡힌 노재현은 눈치껏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서명했고, 최규하에게 "옳지는 않지만 사태가 더 악화되고 군이 분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라는 이유로 서명을 할 것을 부탁했다. 12·12 군사반란에 대한 재판 당시 노재현은 이러한 이유를 변명이랍시고 자기 입으로 말했다. 결국 최규하는 정승화 체포 동의안에 재가 서명을 했는데, 이때 동의안 표지에 재가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이 때문에 체포 당사자들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두환 측의 행위가 재가를 받고 나서야 체포해야 하는 당연한 절차를 어긴, '선체포 후동의'라는 명실상부한 불법행위라는 확실한 증거가 남았다.

     

    이렇게 작전 개시 약 10시간 만에 반란은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