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한민국 사건사고/우리나라 미제 사건 사고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by hwani’s 2023. 11. 10.

목차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목차
    1. 사건개요
    2. 사건내용
    3. 필체 감정
    4. 사건 이후

    사건개요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은 자살 사주와 이른바 자살방조죄에 대한 대법원 판결 중, 실제로 죄가 인정된 유일한 판례였지만 결국 무죄로 판명된 사건입니다.

    사건내용

    1990년 3당 합당 이후 성립된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6월에 개혁적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는 보수적인 정치격변을 이뤄냈습니다. 이에 대해 학생운동권과 재야세력, 평화민주당 등 야당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특히 대학가에서는 80년대의 거리시위가 재연되는 등의 항의와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인 강경대가 경찰의 행동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시위는 더욱 확산되었고, 그로 인해 이후 두 달간 연쇄적인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분신자살 사건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당시 서강대학교 총장이었던 박홍 루카 신부는 기자회견에서 "죽음의 블랙리스트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고 이용하려는 반생명적인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키며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에 정부는 5월 8일에 치안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분신자살 사건의 배후 수사를 결정했고, 검찰총장도 조직적인 배후세력이 있다고 판단하여 전국 검찰에 수사를 지시했습니다.

    1991년 5월 8일 오전 8시 7분에는 당시 전민련 사회부장인 김기설이 서강대학교에서 분신자살을 했습니다. 이 사건 이전인 5월 5일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아리 '소리새벽' 회원인 이XX와 송XX에게 분신 의사를 표명한 후, 7일 오후 7시 30분쯤에는 여자친구인 홍XX을 만나 분신 결의를 밝히며 수첩을 건네주었습니다. 그 이후 이XX는 대책회의 관계자에게 김기설의 분신 결의를 전달하였고, 이를 계기로 전민련 관계자들이 김기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들 중 한 명인 임XX는 김기설을 만나고 대책회의 상황실에서 이XX을 보내 김기설에게 분신 계획을 만류하며 보호를 시도하였고, 전민련도 연세대에 사람을 보내 김기설의 분신 방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5월 8일 아침 6시 30분에는 김기설이 여자친구인 홍씨에게 전화를 걸어 "열심히 살아라"며 자신이 신촌 부근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후 8시 7분에는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 후 투신하였고, 홍씨는 12시에 연세대 대책회의 사무실에 김기설의 수첩을 전달했습니다. 이에 대한 수사를 위해 서울지방검찰청은 전담 조사반을 짜서 강신욱 강력부 부장검사 등을 포함하여 수사를 진행하였고, 전민련은 검찰의 요구에 따라 김기설의 필적이 담긴 사회국 업무일지를 전달했습니다.

    1991년 13일에는 남기춘 등 검사 2명이 김기설이 복무했던 군부대에 가서 감정의뢰 없이 필적을 입수하였고, 오후 10시에는 김기설의 여자친구인 홍씨의 집을 수색하고 그녀를 불법으로 연행하여 4일 동안 약 100시간 동안 수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17일에는 증거보전 절차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15일에는 검찰이 동 단체 총무부장인 강기훈이 1985년에 쓴 진술서를 필적감정 의뢰하도록 하였으며, 16일에는 강기훈의 대학 후배였던 이씨를 강제로 연행하고 강기훈의 집을 수색했습니다. 그리고 18일에는 김기설의 유서와 자필 노트의 필적이 서로 다르다고 판단하여 강기훈과 이씨의 필적과 동일한지 여부를 조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강기훈은 유서를 대필해 준 혐의를 받았습니다. 검찰은 강기훈에 대해 유서대필 등 자살방조 혐의로 압수수색 영장을 발급받아 강기훈의 필적을 입수하는 등 강기훈을 자살방조 피의자로 특정하고 수사를 진행하였으며, 검사 및 검찰 직원은 관례와 달리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방문하여 필적 감정문건에 대해 설명했으며, 국과수 직원은 "어떠한 감정을 원하느냐?"라고 전화통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강기훈 측은 당일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고 강경대 열사 살인폭력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 측의 농성투쟁에 참여했으며, 19일에는 전민련 측이 김기설의 수첩을 대책회의 자료함에서 찾아 20일 해당 수첩 및 강기훈의 옥중 편지를 공개한 후 검찰에 보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검찰과 운동권 사이에 갈등과 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21일에는 숭의여전 학생이 김기설이 4월 18일에 쓴 자필 메모를 공개하였고, '성남 터사랑 청년회' 측은 김기설이 '한정덕'이라는 가명을 쓴 방명록을 공개하였습니다. 22일에는 전교조 강원지부 측이 3월 23일에 원주지회 개소식 당시 김기설의 필적이 담긴 방명록을, 24일에는 전민련도 김기설이 쓴 성남 민청련 활동일지까지 공개하였습니다.

    5월 21일에는 검찰이 김기설의 수첩을 공개하면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하여 수첩 조작 가능성을 제기했으며, 윤석만 검사는 한겨레신문이 필적을 의뢰한 사설 감정원을 압수수색했습니다. 하지만 25일에는 검찰이 국과수 감정결과를 토대로 김기설의 수첩이 조작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해 6월 29일에는 강기훈의 결백을 주장해 온 서준식 전민련 인권위원장이 집시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고, 7월 2일에는 검찰이 유서대필 배후 관련 참고인 14명에 대해 전국 수배령을 내렸고, 업무일지를 작성한 3명을 대필 혐의자로 추적하여 임무영 전민련 사회부장을 연행하여 조사한 결과 대필 혐의가 없다고 판단하여 집시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하였습니다.

    또한, 7월 14일에는 '강기훈 후원회'가 발족되었고, 20일에 변호인단이 강기훈의 보석을 신청했지만 8월 2일에 기각되었습니다. 21일에는 검찰이 강기훈을 국보법 위반 혐의로 추가 기소하였으며, 28일에는 1차 공판에서 변호인들이 일시와 장소가 특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사소송법상 기본 원칙이 무시되었다고 주장하였고, 강기훈 역시 "유서대필 혐의자로 몰린 지난 3개월은 어려웠다"며 "이 사건은 본인을 희생양삼아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현 정권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 다수의 공판이 이어지며, 항소 등의 절차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는 분신자살과 운동권에 대한 회의론이 돌았으며, 학생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그냥 운동권의 흑역사로 남지 않고, 다양한 노력과 심판 과정을 거쳐 공론의 재조명을 받았습니다.

    필체 감정

    대한민국에는 필체 감정 전문가가 극소수였기 때문에 공정한 감정 소견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사건에서는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일본인 감정 전문가에게 필체 감정을 의뢰하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정에 대해 법원은 의문을 제기하며 일본인 감정 전문가를 비판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는 일본인이 한글을 모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법원의 판단이 너무 빠른 것은 아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습니다.

    강기훈은 자신을 허위 감정으로 고발한 김형영에 대해 무혐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는 김형영이 자신들의 주장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국과수 증인을 유죄로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서울지검 형사 6부는 강기훈의 유서대필 사건에서 허위로 문서를 감정한 혐의로 고발된 김형영을 무혐의 처리했습니다. 검찰은 관련 기록과 증인 진술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김형영이 감정서를 허위로 작성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밝혔습니다.

    사건 이후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잊혀질 줄 알았던 강기훈 사건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2002년 4월 28일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에서 '91년 5월, 죽음의 배후'라는 편이 방영되면서 이 사건에 대한 침묵을 지켜온 김기설의 부친이 문제의 유서가 김기설의 자필 유서였다고 증언하면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의 사설감정인들에게 필체 감정을 의뢰한 결과 김기설의 필체라는 소견을 얻었습니다.

    이후 2004년 11월에는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해당 사건을 조사 대상으로 선정하고, 2005년에는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진상규명위원회'가 결성되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재조명하고 국과수에 필체 감정을 재의뢰했습니다. 국과수는 이 사건을 맡아 5명의 감정인으로 재감정하고, 그 결과 필체가 다르다는 의견을 내놓아 1991년 당시의 감정 결과를 뒤집었습니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위에 출석한 1991년의 김형영 감정인도 "감정인에 따라 판정이 다를 수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셈이었습니다.

    이후 2012년 12월 20일부로 법원 재심이 시작되었으나, 강기훈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재심 청구를 진행하였습니다. 2013년 12월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로 김기설의 필체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2014년 2월 13일에 서울고등법원에서 강기훈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이 판결에 대해 상고를 결정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고, 2015년 5월 14일에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강기훈의 무죄가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이후 변호인들은 국가를 상대로 형사보상금과 국가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습니다.

    2017년 7월 6일에는 서울중앙지법에서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인 강기훈에게 6억원의 국가배상 판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문을 저지른 검사들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지나 배상책임이 없다고 판결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여전히 강기훈의 무죄와 국가의 책임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그간 잊혀져 가던 사건이었지만, 2000년대에 다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여러 차례의 재조명과 재심을 거쳐 강기훈의 무죄가 확정되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책임과 사법 기관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