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강화도 해병 2사단 총기피탈 사건
목차
1. 사건 개요
2. 사건 발생
2-1. 범인 수배
2-2. 범인 검거
3. 재판
사건 개요
전방지역인 강화도에서 경계근무를 마치고 귀대하던 해병대 대원 2명이 돌진한 차량에 치인 뒤 칼을 든 남성에게 공격당해 두 명의 해병들 중 한 명은 사망, 다른 한 명은 중상을 입고 K2 소총 1정과 실탄 75발, 수류탄 1발, 유탄 6발을 탈취당한 사건.
범인은 사건 발생 6일 만에 체포되었다.
사건 발생
2007년 12월 6일 오후 5시 40분, 해병대 제2사단 소속으로 강화도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피해자 이모 상병과 박모 일병은 그날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수제선 수색 정찰작전 수행 중이었다. 그런데 지프차가 갑자기 두 사람을 고의로 덮쳤다. 범인은 차에서 내려 박 일병에게 다가가 '괜찮냐'고 묻는가 싶더니, 괜찮다고 대답한 박 일병에게 칼로 얼굴 등을 그었다.
박 일병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수류탄과 유탄이 들어있는 탄통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범인에게 칼로 여섯차례나 찔려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편 상대적으로 부상이 경미했던 이 상병은 개머리판으로 범인의 머리를 가격하는 등 저항했으나, 범인은 허벅지 등을 찌르며 10미터 정도 끌고 가서 K2 소총을 빼앗았다.
소총, 실탄, 그리고 수류탄과 유탄이 들어있는 탄통을 탈취한 범인은 강화도 북쪽 방향으로 도주.
범인 수배
사건 발생 후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오후 6시 30분경, 강화·김포·일산 일대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 범행 발생 시 마침 근처에 있던 목격자 2명과 생존 해병의 증언에 의해 범인의 인상착의가 30대 중반 남자, 키 170cm 정도, 베이지색 잠바, 머리에 상처가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고, 범인이 떨어뜨리고 간 모자, 안경, 족적 등을 수거했으며 CCTV로 범인의 차종과 번호를 전국에 공개수배. 해당 차량은 2007년 10월 경기도 이천에서 도난된 것으로 밝혀졌고, 사건 발생 다음날 전소된 채로 발견.
범인의 행동에는 주저가 없었고 빠르고 냉혹했으며 대담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했다. 단독 범행일지 차 안에 다른 범인이 또 있었을지. 남파 간첩, 대선 후보에 대한 테러, 군에 대한 원한으로 인한 보복, 은행강도 목적 등 생각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이 있었고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경찰은 신고포상금 2천만원을 내걸면서 범인의 몽타주를 배포하였다.
강화도 및 김포의 해병대와 경찰의 검문검색이 강화되었고, 이로 인해 도로가 극심한 교통혼잡을 빚어 많은 사람이 불편을 겪기도 했다. 초지대교로 향하는 김포 일대 같은 경우, 강화에서 나오는 쪽은 차량이 못 빠져나오고 들어가는 차량도 거의 움직이질 못했다고 하니...
문제는 군경의 검문이 번번이 뚫렸다는 것으로, 군/경의 초동 대처가 영 부실했다. 차량이 지명수배된 직후에 곧바로 서서울 인터체인지를 지나는 용의차량을 봤다는 신고가 들어왔지만 대응이 늦어서 범인이 지나간 딱 4분 뒤에 검문을 시작하는 바람에 몇 분 차이로 놓쳤다. 이 와중에 실탄 사격까지 발생했는데, 사건 다음날 1차 검문 뒤 용의점을 발견하지 못해 통과시키려던 차량의 끝번호가 용의차량과 같은 것을 본 19살 일병이 재검문을 요구했으나 운전자가 불응하고 도망치는 것으로 보이자(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실은 재검문을 요구하는 줄 몰랐다고 한다) 차량에 K2 소총 25발을 발사한 것. 하마터면 끔찍한 사달이 날 뻔했으나 다행히 타이어와 트렁크만 파손되고 운전자는 다치지 않았다.
이런 부실한 대처는 여러모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초병이 살해당하고 군용 무기가 탈취된 사건. 그나마 단독 범행이었으며 추가범죄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이 사건이 조직적인 범행으로 이루어졌다거나 혹은 범인이 탈취한 총기로 테러 등의 악행을 저질렀을 경우라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다. 게다가 범인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전국을 활보했는데, 차량을 이용한 범죄라면 전국 어디든 위험할 수 있었는데도 범인의 흔적이 추적되는 곳만 긴장하고 나머지 장소는 안일했다.
하필 사건 발생일은 17대 대선 단 13일 전이었던지라 더욱 비상이 걸렸다. 그야말로 선거 직전이었고, 공교롭게도 사건 발생 바로 전날 이명박 후보가 검찰로부터 BBK 주가조작 사건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받은 참. 그날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최 대선후보 토론회가 있었고, 사건 발생 3시간 뒤인 9시에 KBS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범인이 서울로 진입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대통령 후보들에게도 이 사실이 알려졌다. 사건 다음날 한나라당 당사에 내가 총기탈취범이라며 '이명박을 죽이겠다'는 장난전화가 오기도 했다. 당연히 이명박 측은 엄청나게 긴장했다. 이날 토론회가 끝난 뒤 다른 후보들은 정문 지상주차장을 통해 차를 타고 돌아간 반면 혼자만은 삼엄한 경계 속에 지하통로를 이용했으며, 모든 야외 일정을 취소하고 실내행사 때는 폭발물 탐지견까지 동원해 전면적으로 수색을 했다. 이명박 본인도 방탄조끼를 입었다. 그러나 경쟁자 정동영, 이회창은 방탄복을 입지 않고 거리 유세와 시민과의 악수, 포옹 행사를 계속했다. 특히 정동영은 아들이 마침 총기를 빼앗긴 사단에서 복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험에 노출된 병사들 생각을 해서라도 방탄복을 입지 않겠다고 사양했다고. 테러 위협에 굴하지 않는 모습으로 열세를 극복해보겠다는 내심도 있었다.
후보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경호팀의 인력과 장비는 확충. 주변 경계 강화, SWAT 2개에서 5개로 늘리기, 자택에도 전술팀 1개 배치 등. 또 원래 유세장 인근 건물에 비상시를 대비해 특수저격조가 배치되는데 이 일로 인해 2배로 늘었고, 헬기도 근처에 대기시켰다.
범인 검거
일이 너무 커진 게 두려웠는지, 범인은 사건 발생 5일째 되던 11일, 경찰에 자수 편지를 보내 총기를 묻은 곳을 밝혔다. 아직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기에 진짜 범인의 편지가 맞음을 확신한 경찰은 탈취된 무기들을 호남고속도로 하행선인 전남 장성군 백양사휴게소 200m 부근 박산교 아래 개천천에서 모두 회수했고, 지문조회를 통해(범인은 편지 종이에 지문이 남는다는 사실을 몰랐다) 범인의 신원을 확인, 결국 사건 발생 6일째 되던 12월 12일, 경찰이 그를 검거했다.
범인 조영국(당시 35세)은 경찰의 초기 추정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경찰은 범인이 강화도의 지리와 초병 근무교대 시간 등을 파악하고 있는 강화도 주민 혹은 강화도에서 군복무를 했던 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했으나, 오히려 범인은 강화도에서 근무한 적은커녕 아무 연고도 없었으며,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보기 위해 오프로드 차량 동호회에 가입해 다니던 곳이 강화도라 지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고 한다. 일부에선 과감한 행동을 볼 때 특수부대 출신일 가능성도 제기했지만, 실제로는 일반 육군 포병 출신이었다. 그리고 전과자도 아니었다. 이렇게 당초의 용의선상과 전혀 거리가 먼 자였기 때문에, 만약 자수 편지를 보내지 않았거나, 편지에서 지문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사실상 화성 해안초소 K-2 소총 사취 사건처럼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았을 가능성도 컸다.
이런 짓을 한 이유는 어이없게도 변심한 애인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세상이 놀랄 만한 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몰락한 모습을 옛 애인이 보고 괴로워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한다. 사업에 실패하고 월세가 8개월이나 밀릴 정도로 경제난에 빠진데다, 애인한테까지 차이자, 절망에 빠지고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품으며 자포자기 상태로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범죄였다.
대선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그저 우연한 시기의 일치였을 뿐이며, 피해 해병을 죽일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엔 빼앗은 무기로 뭘 할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지만, 경찰의 계속된 추궁에 탈취한 총기와 무기를 나중에 강도질을 할때 쓰려 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범행 3개월 전부터 서울 소재 한 대학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아왔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건 당일인 6일에 비가 내리자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혀 코란도 차를 운전하며 강화도 일대를 배회하다가 순찰하는 군인들을 본 순간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요약하자면, 애인은 변심하여 떠나버리고 사업에 실패해 경제적으로도 무척 곤란한 상태가 되자 우울증에 걸렸고,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자포자기성 화풀이/사회에 대한 분풀이 겸, 돈을 마련하기 위한 강도에 쓸 무기도 얻기 위해서 범행을 저질렀던 것.
재판
범인은 군사법원에 회부되어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원래 민간인은 군사재판의 대상이 아니지만 계엄령이 선포되었을 경우, 군형법 상 간첩, 유해 음식물 공급, 초병에 대한 범죄(살해, 살해미수, 상해죄, 협박, 폭행), 군용물에 관한 범죄, 초소침범, 포로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민간인이더라도 군인에 준하여 군사재판을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 그는 군사보호구역 내에서 군인을 습격해 살인 및 중상해를 입히고 총과 실탄, 수류탄을 탈취한 혐의였다. 다만 2심에서 ‘총기를 탈취하려는 고의’는 있었지만 초병을 ‘살해하겠다는 고의’는 입증되지 않았기에 15년형으로 감형되었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2022년 12월 출소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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