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공격포지션 어디든 완벽하게 소화 해내는 유니크 스트라이커 ‘황선홍’
목차
1. 선수소개
2. 경기스타일
3. 클럽경력
선수소개
- 황선홍 (Hwang Sun-Hong)
- 생년월일 : 1968년 7월 14일, 키 : 183cm, 체중 : 80kg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타겟형 스트라이커.
- 국가대표(A매치) 103경기 50골로 A매치 득점 2위이며 센추리 클럽 가입자.
- 한국 축구선수 유일의 해외리그 득점왕.
- 90년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부동의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하며, 홍명보와 함께 H-H 라인으로 불리며 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끈 상징적인 선수.
- 클럽팀은 K리그 포항 스틸러스(1993~1997), J리그 세레소 오사카(1998~1999), 가시와 레이솔(2000~2002) 등에서 활약.
경기스타일
- 그 어떤 전술의, 그 어떤 공격권의 포지션에 넣어놓아도 최소 미친 활약을 펼치는 매우 유니크한 스트라이커.
- 이런 장점은 팀의 전술이 자신 위주로 돌아가야 빛을 발하는 후배 국가대표 공격수인 이동국과 박주영의 약점에 비춰봤을 때 국가대표팀이 그를 뽑을 수밖에 없는 매우 중요한 이유.
- 그가 선수 시절을 하는 동안 어떤 국가대표 감독이든 반드시 황선홍을 최전방 공격수로 썼으며, 황선홍이 국가대표에 뽑히지 않았을 때는 그가 부상 중이었을 때 밖에 없음.
- 선수 시절 황선홍은 최전방 공격수로서 갖춰야할 모든 덕목을 두루 갖춘 만능형 스트라이커.
우선 그는 최소한 우리나라 선수 중 그 당시 훌륭한 183의 키와 준수한 주력, 피지컬을 바탕으로 온갖 종류의 슈팅 테크닉을 실전에서 시도할 수 있는 수준의 공격수.
- 발기술도 괜찮아서 순간적인 발밑 기술로 공을 지켜 내거나, 상대 진영으로 공을 전진 시도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고, 시야와 패싱 능력도 나름 준수하게 갖추어 연계 플레이 역시 뛰어남.
- 개인 전술의 폭이 매우 넓고, 거기에 넓은 활동 반경에 지능적인 오프 더 볼 움직임 역시 갖추고 있었고, 이것이 그가 선수로 활약하던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의 모든 감독들이 황선홍을 기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국가의 자존심이 걸려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자국에서 벌어지는 월드컵의 역사상 첫 승을 노리던 첫 번째 경기에서 35세의 노장 선수가 선발 원톱으로 나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함.
- 그만큼 황선홍의 클래스가 뛰어났다는 것. 본래는 가급적 젊은 선수를 기용하고 싶었지만 그가 제일 뛰어났기에 기용된 것.
- 윗 내용만 보면 월드클래스 공격수처럼 보일 수 있는데, 전부 당대 아시아 레벨. 세계 레벨에선 한계가 명확.
- 주로 최전방의 타켓형 스트라이커로 뛰는 경우가 많았는데 항상 수비수 2~3명을 끌고 다니며 공간을 만들었고 수비를 등지고 하는 플레이도 뛰어남. 그에 따라 슈팅 기회를 직접 갖기도 했지만 다른 2선 선수들에게 공간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주로 했음.
- 이렇게 한국축구에서 유니크한 스타일을 보여주다보니, 그의 후계자를 찾는데에도 꽤나 애를 먹었는데, 황선홍 은퇴 이후 황선홍의 역할을 맡았던 선수는 이동국, 조재진, 박주영, 이근호, 김신욱 등이 있지만 모두 황선홍과 비교할 때 조금씩 모자란 플레이를 보여줌.
- 2010년 이후 손흥민이란 걸출한 공격수가 나왔지만 황선홍과 달리 주력을 바탕으로 한 2선 침투에 능한 선수라 결국 대표팀은 박주영과 같은 타켓형 스트라이커를 필요로 함.
- 그렇게 16년여가 지난 2018년이 되어서야 황의조가 다시금 후계자의 가능성을 보이는 중.
클럽 경력
바이어 04 레버쿠젠
- 건국대학교를 졸업 후 1991년 K리그의 드래프트 제도를 거부하고 차범근이 활약했던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 레버쿠젠에 진출하나 아마추어팀.
부퍼탈 SV 보루시아
- 1992년 2부리그 부퍼탈로 이적했지만 9경기 3골의 기록을 남기고 무릎 부상(십자인대)로 한국으로 리턴.
- 이때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 하나를 남기게 되는데 바로 "1 VS 8 지명권 트레이드".이전 해의 드래프트 결과로 황선홍을 지명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완산 푸마에 포항제철 아톰즈는 소속 팀 선수 8명과 황선홍 한 명을 바꾸는 사상 초유의 트레이드를 제안.
- 당시 신생 팀이던 완산 푸마는 한 명이라도 선수가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황선홍은 1993년부터 포항 소속으로 뛰게 됨.
포항제철 아톰즈/포항 아톰즈/포항 스틸러스
- 1993년부터 1998년 7월까지 포항에서 활약, 홍명보, 라데 보그다노비치, 최문식, 박창현, 박태하 등의 전설적인 동료들과 함께 포항의 1990년대 황금시대의 한 축을 이뤘고, 특히 라데와의 공격 투톱은 지금도 회자가 될 정도.
- 국가대표 차출이 없었던 1995시즌에 8경기 연속골 기록을 포함, 11골 6도움을 기록하며 득점 3위에 오른 것이 커리어 하이.
- 1997~1998년 포항 스틸러스의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2연패에 일조.
세레소 오사카
- 1998년 7월,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 그 이듬해 26골로 J리그 득점왕을 차지.
- 2020년 현재까지도 최초이자 유일하게 한국인 선수가 외국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사례.
수원 삼성 블루윙즈
- 2000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국내 무대에 복귀하나 부상으로 정규 리그에서 뛰지 못하고 맞트레이드 형식으로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로 임대.
가시와 레이솔 (임대 후 완전이적)
- 2000년 5월 샤샤와 임대 형식의 맞트레이드가 성사되어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에 2001년 말까지 임대.
- 2000년 7월 샤샤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방출. 황선홍 역시 2000년 7월 가시와 레이솔에 완전이적 하는 것으로 신분이 정리.
- 당시 같은 팀에 있던 홍명보, 유상철과 함께 코리안 트리오로서 맹활약.
- 월드컵이 끝나고 1달 후인 2002년 8월, 월드컵 때 입은 부상으로 결장이 계속되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회복자체가 불투명하자 방출, 8월 17일 고별전을 끝으로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컴백.
전남 드래곤즈
- 대전 시티즌과 전남 드래곤즈 중 전남 드래곤즈를 선택해 이회택 감독과 면담을 하고 2002년 10월 월봉 2000만원에 계약.
- 그러나 정강이 뼈 부상이 심각해 재활훈련에도 불구,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
현역 은퇴
- 황선홍은 시즌 종료 후인 2002년 12월 정확한 진단을 받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는데, 의사에게서 "6개월 이상의 안정이 필요하다" 라는 진단을 받고 은퇴를 결심.
- 2003년 2월 9일 기자회견을 통해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의 길을 갈 것을 발표.
- K리그 통산 성적은 64경기 31골 16어시스트.
- 해외에 나가있었던 시즌도 꽤 되고 부상으로 허비한 시즌도 상당하며, 90년대에는 리그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해서 항상 국대 차출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8게임 연속골 기록이나 라데와의 투톱이 준 임팩트를 제외하면 명성에 비해 K리그 커리어는 빈약한 편.
- 선수 황선홍이 한국축구의 레전드라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K리그 레전드라고 하기는 힘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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