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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축구 스토리

공격포지션 어디든 완벽하게 소화 해내는 유니크 스트라이커 ‘황선홍’

by hwani’s 2021. 2. 1.

목차

    공격포지션 어디든 완벽하게 소화 해내는 유니크 스트라이커 ‘황선홍’

    목차
    1. 선수소개
    2. 경기스타일
    3. 클럽경력

    선수소개

    - 황선홍 (Hwang Sun-Hong)

    - 생년월일 : 1968년 7월 14일, 키 : 183cm, 체중 : 80kg

    -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타겟형 스트라이커.

    - 국가대표(A매치) 103경기 50골로 A매치 득점 2위이며 센추리 클럽 가입자.

    - 한국 축구선수 유일의 해외리그 득점왕.

    - 90년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부동의 최전방 공격수로 활약하며, 홍명보와 함께 H-H 라인으로 불리며 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끈 상징적인 선수.

    - 클럽팀은 K리그 포항 스틸러스(1993~1997), J리그 세레소 오사카(1998~1999), 가시와 레이솔(2000~2002) 등에서 활약.

    경기스타일

    - 그 어떤 전술의, 그 어떤 공격권의 포지션에 넣어놓아도 최소 미친 활약을 펼치는 매우 유니크한 스트라이커.

    - 이런 장점은 팀의 전술이 자신 위주로 돌아가야 빛을 발하는 후배 국가대표 공격수인 이동국과 박주영의 약점에 비춰봤을 때 국가대표팀이 그를 뽑을 수밖에 없는 매우 중요한 이유.

    - 그가 선수 시절을 하는 동안 어떤 국가대표 감독이든 반드시 황선홍을 최전방 공격수로 썼으며, 황선홍이 국가대표에 뽑히지 않았을 때는 그가 부상 중이었을 때 밖에 없음.

    - 선수 시절 황선홍은 최전방 공격수로서 갖춰야할 모든 덕목을 두루 갖춘 만능형 스트라이커.

    우선 그는 최소한 우리나라 선수 중 그 당시 훌륭한 183의 키와 준수한 주력, 피지컬을 바탕으로 온갖 종류의 슈팅 테크닉을 실전에서 시도할 수 있는 수준의 공격수.

    - 발기술도 괜찮아서 순간적인 발밑 기술로 공을 지켜 내거나, 상대 진영으로 공을 전진 시도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고, 시야와 패싱 능력도 나름 준수하게 갖추어 연계 플레이 역시 뛰어남.

    - 개인 전술의 폭이 매우 넓고, 거기에 넓은 활동 반경에 지능적인 오프 더 볼 움직임 역시 갖추고 있었고, 이것이 그가 선수로 활약하던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의 모든 감독들이 황선홍을 기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국가의 자존심이 걸려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자국에서 벌어지는 월드컵의 역사상 첫 승을 노리던 첫 번째 경기에서 35세의 노장 선수가 선발 원톱으로 나왔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함.

    - 그만큼 황선홍의 클래스가 뛰어났다는 것. 본래는 가급적 젊은 선수를 기용하고 싶었지만 그가 제일 뛰어났기에 기용된 것.

    - 윗 내용만 보면 월드클래스 공격수처럼 보일 수 있는데, 전부 당대 아시아 레벨. 세계 레벨에선 한계가 명확.

    - 주로 최전방의 타켓형 스트라이커로 뛰는 경우가 많았는데 항상 수비수 2~3명을 끌고 다니며 공간을 만들었고 수비를 등지고 하는 플레이도 뛰어남. 그에 따라 슈팅 기회를 직접 갖기도 했지만 다른 2선 선수들에게 공간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주로 했음.

    - 이렇게 한국축구에서 유니크한 스타일을 보여주다보니, 그의 후계자를 찾는데에도 꽤나 애를 먹었는데, 황선홍 은퇴 이후 황선홍의 역할을 맡았던 선수는 이동국, 조재진, 박주영, 이근호, 김신욱 등이 있지만 모두 황선홍과 비교할 때 조금씩 모자란 플레이를 보여줌.

    - 2010년 이후 손흥민이란 걸출한 공격수가 나왔지만 황선홍과 달리 주력을 바탕으로 한 2선 침투에 능한 선수라 결국 대표팀은 박주영과 같은 타켓형 스트라이커를 필요로 함.

    - 그렇게 16년여가 지난 2018년이 되어서야 황의조가 다시금 후계자의 가능성을 보이는 중.

    클럽 경력

    바이어 04 레버쿠젠

    - 건국대학교를 졸업 후 1991년 K리그의 드래프트 제도를 거부하고 차범근이 활약했던 독일 분데스리가 소속 레버쿠젠에 진출하나 아마추어팀.

    부퍼탈 SV 보루시아

    - 1992년 2부리그 부퍼탈로 이적했지만 9경기 3골의 기록을 남기고 무릎 부상(십자인대)로 한국으로 리턴.

    - 이때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 하나를 남기게 되는데 바로 "1 VS 8 지명권 트레이드".이전 해의 드래프트 결과로 황선홍을 지명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완산 푸마에 포항제철 아톰즈는 소속 팀 선수 8명과 황선홍 한 명을 바꾸는 사상 초유의 트레이드를 제안.

    - 당시 신생 팀이던 완산 푸마는 한 명이라도 선수가 아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결국 황선홍은 1993년부터 포항 소속으로 뛰게 됨.

    포항제철 아톰즈/포항 아톰즈/포항 스틸러스

    - 1993년부터 1998년 7월까지 포항에서 활약, 홍명보, 라데 보그다노비치, 최문식, 박창현, 박태하 등의 전설적인 동료들과 함께 포항의 1990년대 황금시대의 한 축을 이뤘고, 특히 라데와의 공격 투톱은 지금도 회자가 될 정도.

    - 국가대표 차출이 없었던 1995시즌에 8경기 연속골 기록을 포함, 11골 6도움을 기록하며 득점 3위에 오른 것이 커리어 하이.

    - 1997~1998년 포항 스틸러스의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2연패에 일조.

    세레소 오사카

    - 1998년 7월, J리그의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 그 이듬해 26골로 J리그 득점왕을 차지.

    - 2020년 현재까지도 최초이자 유일하게 한국인 선수가 외국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사례.

    수원 삼성 블루윙즈

    - 2000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국내 무대에 복귀하나 부상으로 정규 리그에서 뛰지 못하고 맞트레이드 형식으로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로 임대.

    가시와 레이솔 (임대 후 완전이적)

    - 2000년 5월 샤샤와 임대 형식의 맞트레이드가 성사되어 J리그의 가시와 레이솔에 2001년 말까지 임대.

    - 2000년 7월 샤샤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방출. 황선홍 역시 2000년 7월 가시와 레이솔에 완전이적 하는 것으로 신분이 정리.

    - 당시 같은 팀에 있던 홍명보, 유상철과 함께 코리안 트리오로서 맹활약.

    - 월드컵이 끝나고 1달 후인 2002년 8월, 월드컵 때 입은 부상으로 결장이 계속되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회복자체가 불투명하자 방출, 8월 17일 고별전을 끝으로 일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컴백.

    전남 드래곤즈

    - 대전 시티즌과 전남 드래곤즈 중 전남 드래곤즈를 선택해 이회택 감독과 면담을 하고 2002년 10월 월봉 2000만원에 계약.

    - 그러나 정강이 뼈 부상이 심각해 재활훈련에도 불구,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

    현역 은퇴

    - 황선홍은 시즌 종료 후인 2002년 12월 정확한 진단을 받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는데, 의사에게서 "6개월 이상의 안정이 필요하다" 라는 진단을 받고 은퇴를 결심.

    - 2003년 2월 9일 기자회견을 통해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지도자의 길을 갈 것을 발표.

    - K리그 통산 성적은 64경기 31골 16어시스트.

    - 해외에 나가있었던 시즌도 꽤 되고 부상으로 허비한 시즌도 상당하며, 90년대에는 리그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해서 항상 국대 차출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8게임 연속골 기록이나 라데와의 투톱이 준 임팩트를 제외하면 명성에 비해 K리그 커리어는 빈약한 편.

    - 선수 황선홍이 한국축구의 레전드라는 점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K리그 레전드라고 하기는 힘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