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한국의 레전드 파워형 스트라이커 ' 최용수'
목차
1. 선수소개
2. 경기스타일
3. 클럽경력
선수소개
- 최용수
- 생년월일 : 1971년 9월 10일, 키 : 184cm
- 페널티 에이리어 안에서 발군의 파괴력을 보이는 공격수.
- 1990년대 대한민국 정상급 스트라이커들이 그렇듯 아시아권에서 압도적인 제공권을 보였으며, 강력한 슈팅력을 보유. 이 때문에 독수리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독종 소리를 들을 정도로 승부 근성이 대단했기 때문에 J리그 진출 당시 사무라이라는 별명으로 불림.
- 1998 프랑스 월드컵과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된 한국축구의 레전드 스트라이커.
경기스타일
- 최용수의 이전부터는 물론 현재까지도 국내 공격수(스트라이커 포지션) 중 최용수보다 성공한 선수는 몇 안 되지만, 그럼에도 최용수는 너무 일찍 나타난 영웅.
- 준수한 결정력과 능숙한 포스트 플레이, 뛰어난 제공권 등 현대 축구에서 요구하는 덕목을 거의 갖춘 선수.
- 현 시대의 호베르투 피르미누(리버풀), 카림 벤제마(레알 마드리드)처럼 전형적인 최전방 공격수지만 조금 수비적으로 내려와 2선과 연계해주는 플레이만 결합된다면 현대 축구에서 가장 교과서적인 선수가 되었을 것.
- 타겟형 스트라이커 치고 그리 장신은 아니지만 당시 한국 축구에서는 꽤 큰 편. 그런데 볼의 낙하 지점, 헤더 타이밍과 더불어 점프가 높아서 제공권은 국내 톱 클래스.
- 과감한 몸싸움과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는 전형적인 파워형 스트라이커,
-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는 최다 득점을 기록. 당시 세계 골게터 9위에 오를 정도로 월드컵 예선을 보던 이들은 하나같이 최용수를 칭찬했고 인기는 하늘을 찔렀으며 그에 대한 기대도 남달랐지만, 같은 시기 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 경쟁자였던 황선홍이나 김도훈에 비해서 에이리어 밖에서 움직임이 단조롭다는 단점이 있었음.
-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공격수들이라 할 수 있는 최용수, 김도훈의 은퇴 후 한국은 최전방 포지션에 상당한 난항을 겪게 되는데, 안정환이 있으나 본인은 공격형 미드필더 내지 섀도우 스트라이커 룰을 선호, 대신 싸워줄 파이터 타입의 최전방 포지션이 비어서 유상철을 톱으로 올리는 비정상적인 운영까지 했음.
- 애초에 2018년 6월 19일 현재 K리그 득점 순위에 국내 공격수 최다 득점자가 나이 40에 조커로 활약하는 이동국인 것만 봐도 한국의 정통 공격수 계보는 사실상 끊겼다 봐도 무방하며 최용수가 주전으로 뛰기 힘들어하던 그 시절과 비교하면 아주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
- 2018 아시안게임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우승의 주역 중 한 명이었던 황의조가 후계자로 떠오를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음.
클럽 경력
LG 치타스 / 안양 LG 치타스
- 1994년 LG 치타스 (현 FC 서울) 입단 후 신인상 수상.
상주 상무(군 복무)
- 1997년 상무에 입단, 1999년에 다시 안양 LG 치타스로 복귀.
- 1999년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입단 테스트 제의를 받고 김도근과 같이 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했으나 거기까지... 분명히 입단 테스트랑 메디컬 테스트까지는 받았는데 왠지 모르게 컴백. 본인도 이유를 모름.
- 99년 중반에 군복무를 끝내고 안양 LG로 돌아와 2000년 K리그 우승.
- 우승과 더불어 2000년 K리그에서 득점 2위 어시 1위를 하며 만장일치로 리그 MVP.
제프 유나이티드
- 2001년 당시 한국 선수 최고 금액인 이적료 3억 엔에 제프 유나이티드로 옮겨 이적 첫 해에 득점 2위를 기록, 올스타 선정.
- 2002년에는 J리그 8천번째 골을 넣는 등 활약을 펼침.
- 2003년에서도 팀내 6-7할에 가까운 골을 넣으며 제프 이치하라의 3년간 에이스로 군림. 이때 개막전에 골을 넣고 다음 시합과 그 다음 시합에 해트트릭을 기록해 이 달의 아시아 선수에도 뽑힘.
- 오래 전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페널티 에어리어에서 최용수보다 존재감 넘치는 공격수는 거의 없다.", "한국은 최용수 이후로 이렇다 할 공격수가 없지."라는 평가가 따라다닌다. 지금도 최용수는 제프 유나이티드에서 팀의 레전드로 인정을 받는중.
교토 상가 FC
- 2003년 교토 상가에 1년간 임대. 등번호는 21번이며, 시즌 도중에 부상이 있기는 했으나 주장도 겸임할 만큼 많은 신뢰를 받고 많은 골을 넣었으나 팀이 6위로 승격하지 못해 아쉬운 한 해.
주빌로 이와타
- 2005년 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했으나 부상과 부진으로 15경기 1골이라는 실망스런 성적.
FC 서울
- 2006년 FC 서울의 플레잉 코치로 입단하여 정규리그 2경기에 출전하였고 같은 해 8월 5일 FC 도쿄와의 친선 경기에서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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