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진 룸살롱 서진회관 17호실 집단 살인 사건
목차
1. 사건 발단
2. 사건 발생
3. 사건 수사 및 검거
사건 발단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30분, 서울 강남의 유명한 룸살롱인 서진회관의 17호실에서 목포와 신안 출신의 조직폭력배 일당인 맘보파 조직원 7명이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교통사고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가 광복절 특사로 석방된 맘보파 조직원 고용수(당시 29세)의 석방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습니다.
술자리가 점점 흥겨워지던 중, 방이 좁다며 맘보파 일행이 종업원에게 다른 방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했지만, 당일이 광복절 공휴일이어서 모든 방이 손님들로 가득 찼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옆방인 16호실과 20호실에서는 유도대학 선후배 사이인 8명의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방 변경 요구가 거절되자 맘보파 일행 중 한 명이 종업원을 폭행했고, 이를 본 다른 조직원들이 말려 종업원을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서울 목포파 조직원들은 종업원의 상황을 확인하고 이를 문제 삼았습니다. 자신들의 구역에 동의 없이 들어와 술을 마시는 것도 불편했지만, 동생 같은 종업원을 구타한 것에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맘보파 일행이 자신들보다 실전 경험이 많고 강한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어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사건 발생
복도에서 만난 두 파벌의 사람들은 서로 고향이 같은 목포라는 것을 알고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습니다. 하지만 고금석이 자신의 소속 조직에서 근무하는 웨이터를 폭행한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아, 조원섭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본 조원섭이 고금석을 비난하며 점점 더 공격적으로 대응하자, 고금석은 참았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그러자 두 파벌의 조직원들이 좁은 복도에서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목포파 측의 행동대장 김동술이 숨겨두었던 흉기를 꺼내 들었고, 조원섭은 이를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김동술이 조원섭의 팔을 찌르고, 고금석도 조원섭의 허벅지를 찔렀습니다. 조원섭이 쓰러지자 맘보파 일행들은 당황하여 화장실과 17호 실로 도망갔습니다.
이후 목포파 일행들은 야구 방망이와 칼 등으로 무장한 뒤, 17호 실의 문을 부수고 난입했습니다. 이들은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며, 특히 조직의 핵심 인물인 조원섭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습니다. 그 결과 맘보파 조직원 7명 중 4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나머지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사건 직후 도주했던 일부 조직원들은 경찰 수사가 확대되자 자수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 없었던 사람들을 위장 자수시키는 등 수사를 방해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주범인 장진석과 김동술은 전북 임실군의 외딴섬에 숨어 낚시꾼으로 위장하며 도피했습니다.
사건 수사 및 검거
경찰은 '서진 룸살롱 사건'이라는 큰 사건의 정확한 실체와 연루자들을 모두 밝혀내기 위해 열심히 수사했습니다. 경찰은 위장 자수한 사람들을 걸러내고 가담자들의 실체를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달아난 주범 장진석과 김동술의 소재를 찾기 위해 정보망을 총동원했습니다. 결국 경찰은 두 사람의 위치를 알아내고 5명의 무술 고단자 형사를 현장에 급파했습니다.
장진석과 김동술은 '독 안의 쥐'가 되어 쉽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칼과 낚시 도구 등 흉기를 들고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노련한 형사들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검거되었습니다. 서울로 압송된 장진석과 김동술은 TV 카메라 앞에서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뻔뻔한 모습을 보여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허세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재판에서 검찰이 사형을 구형하자 엉엉 울면서 죽을 죄를 졌다고 하소연하는 등 처량한 모습으로 돌변했다고 합니다. 체포된 지 보름이 지나고 현장검증을 했는데 180도 다른 모습으로 내내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방송에 나왔습니다. 당시는 군사정권 아래 경찰의 권력과 폭력성이 가장 강했던 때였으며, 잘못 다뤘다간 파장이 클 수 있는 운동권 학생이 아닌 조직폭력배를 심문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조폭의 환상에 빠져 객기를 부리다가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총 12명의 두 폭력조직 조직원들이 구속되었고, 1심과 항소심, 대법원을 거치면서 김동술과 고금석이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두 사형수는 범행이 너무나 잔혹했던 탓에 같은 재소자들에게도 두려움을 사서 외롭게 지냈다고 합니다. 결국 김동술과 고금석은 사건이 발생한 지 3년이 지난 1989년 8월 4일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김동술의 사형 집행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형구가 고장나 말을 안 들었던 것입니다. 버튼을 눌렀는데도 바닥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김동술을 옆으로 치워 놓고 그 자리에서 교수대를 수리했는데 수리를 하는 45분 동안 집행이 지연되었습니다. 김동술은 그 시간 내내 "주여, 이 몸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큰소리로 기도하는 등 덜덜 떨며 누워 있다가 교수대 수리가 끝나자 재집행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징역 20년을 선고받은 박영진은 2006년 출소 후 2010년에 장진석의 누나와 결혼했고, 장진석과 김승길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수감 생활을 하다가 2017년 특별사면되어 출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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